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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어휘력을 판단할 때, 우리는 대개 알고 있는 단어의 양에 집중하곤 한다. 아이들이 단어장을 외우고 뜻을 암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글을 써보라고 하면 “단어는 머릿속에 있는데 문장이 잘 안 써져요”, “맨날 비슷한 표현만 쓰게 돼요”라고 말한다. 단어를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분명한 온도차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간극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어휘력이 단순히 단어의 양으로 만들어지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휘력이란 단어를 많이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맥락 속에서 가장 적합한 표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단어장을 통해 외운 어휘는 머릿속에 저장될 수는 있지만, 실제 글쓰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려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연결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단어 암기는 어휘력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로 완성 단계가 될 수는 없다.
어휘력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읽기 방식부터 달라져야 한다. 많은 학생들이 독서를 하면서 모르는 단어에 밑줄을 긋고 뜻을 찾아 적는 데 집중한다. 물론 이 과정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자칫하면 단어를 글의 흐름과 분리된 정보로만 남겨 두기 쉽다. 그렇게 정리된 단어는 기억에는 남을지 몰라도, 글 전체의 의미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어휘력을 키우는 읽기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외우는 과정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단어가 문장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주변 단어들과 어우러지며 어떤 뉘앙스를 만들어 내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 글에서 ‘important’ 대신 ‘crucial’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이를 단순한 유사어 정도로 이해하고 지나쳐서는 안 된다. 왜 저자는 이 단어를 선택했을까, 이 선택이 문장의 긴장감을 어떻게 끌어올리고 주장을 얼마나 더 강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휘는 암기의 대상이 아니라 표현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은 학생들의 글은 익숙한 표현이 반복되면서 전체 흐름이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단순히 다른 단어를 써보라고 조언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어렵다. 그보다는 표현이 바뀔 때 문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스스로 느끼게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The character is sad”라는 문장을 놓고 upset, distressed, disheartened, gloomy와 같은 단어를 차례로 대입해 보면, 같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다루고 있더라도 선택하는 표현에 따라 감정의 강도와 분위기, 그리고 화자가 그 감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비교를 반복하다 보면 학생은 단어를 단순히 맞춰야 할 정답으로 인식하는 데서 벗어나, 글의 목적과 맥락에 따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풍부한 의미의 도구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휘력의 깊이는 배경지식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어는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갖기보다, 어떤 맥락 속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깊이를 띤다. 예를 들어 ‘conflict’라는 단어를 단순히 개인 간의 다툼 정도로 이해하는 학생과, 이를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갈등의 맥락 속에서 접해 본 학생은 같은 단어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된다. 단순히 뜻을 아는 수준을 넘어, 그 단어가 담고 있는 맥락과 세계를 함께 이해할 때 비로소 어휘는 살아 있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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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언어 감각을 키우는 경험은 어휘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영어 자막을 함께 살펴보는 습관은 매우 효과적인 훈련이 될 수 있다. 화가 난 장면에서는 어떤 단어가 선택되는지,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할 때는 어떤 문장이 사용되는지, 또 격식 있는 상황과 일상적인 대화에서 표현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자연스럽게 반복해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학생은 단어 하나하나를 따로 외우기보다, 실제 상황 속에서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암기식 어휘 학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글쓰기와 표현력 전반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언어 자산이다.
예를 들어 실망을 표현할 때 교과서적으로 “I’m so disappointed”라고 직접 말하기보다, 실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감정을 훨씬 우회적이고 맥락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노멀 피플 (Normal People)>에서는 관계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는 장면에서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의 무게와 혼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실망을 표현한다. 또 영화 <결혼 이야기 (Marriage Story)>에서도 갈등이 고조되는 대화 속에서 인물은 단순히 ‘실망했다’고 말하기보다, 그 경험이 자신의 감정 균형을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처럼 감정을 직접 표현하기보다 상황을 풀어내는 방식은 훨씬 깊고 입체적인 뉘앙스를 전달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는 작은 실천만으로도 어휘력은 향상될 수 있다. 일기를 쓰며 한 문장을 조금 더 정확하게 다듬어 보거나, 읽은 글에서 인상 깊은 표현 하나를 골라 왜 그것이 효과적인지 생각해 보는 것, 또 자신의 글에서 가장 단순한 표현 하나를 선택해 더 적절한 말로 바꾸어 보는 연습은 언어 감각을 일깨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휘력의 성장은 거창한 학습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자신의 표현을 의식하고 조금 더 나은 말로 다듬으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결국 어휘력의 완성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부단한 읽기와 사유의 과정에 있다. 일상의 언어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다시 문장으로 표현해 보는 경험이 쌓일수록 어휘의 깊이 또한 자연스럽게 더해진다. 중요한 것은 단어의 양이 아니라, 맥락에 맞는 표현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정확한 어휘가 문장 속에서 제자리를 찾을 때 우리의 생각은 보다 분명해지고, 글은 한층 설득력을 띠게 된다. 이는 타고난 재능의 결과가 아니라, 올바른 학습이 반복되며 서서히 만들어지는 변화이다.
전정훈 원장
Edu-Kingdom College, North Shore
newcan11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