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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로, 금강산과 인왕산 등 우리나라의 실제 산천을 독자적인 필법으로 그려 수묵화(水墨畵)의 전통을 확립한 인물이다. 그분의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거의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 풍속화(風俗畵)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 역시 수묵을 이용한 산수화와 인물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화가였다. 그의 풍속화 그림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먹은 ‘묵(墨)’으로 적고, 먹으로 그린 그림은 ‘묵화(墨畵)’라 한다. 먹색 하나로 농도를 조절해 원근이나 강약을 표현한 그림이 바로 수묵화(水墨畵)다. 농도가 짙고 옅은 것을 ‘농담(濃淡)’이라 하는데, 하나의 먹색으로도 백 가지 넘게 농담을 달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먹색에 다른 색을 더하면 안 될까? 안 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창원의 다촌 서영호 선생은 먹색에 약간의 푸른색을 더해 검푸른 석류 잎을 그렸다. 잘 익어 터져 속살이 드러난 빨간 석류도 아름답지만, 검푸른 잎사귀들이 워낙 당당해 첫눈에 그 그림에 마음을 빼앗겼다. 일생 중 망설임 없이 첫눈에 결정한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미술을 모르는 나도 좋고 멋진 것은 알아본다.
내가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이 시대에도 산수화와 문인화, 민화 등에서 먹색의 맛을 살리는 작가들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고양이와 호랑이를 구분해 그리지 못하고, 색으로 원근을 표현할 줄도 모른다. 어찌 그런 재주는 받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미술 시간이 제일 불편했다. 준비물에 돈이 들었고, 그것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으니 부끄럽고 기를 펴지 못했다. 흰 캔버스를 얹은 이젤 앞에 앉은 사람은 마치 다른 나라 사람 같았다. 내게 미술은 늘 멀기만 한 세계였다.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옛 선비들이 학문과 예술 활동에 사용하던 네 가지 필수 도구인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를 말한다. 단단하고 무거운 돌판인 벼루에 먹을 갈려면 물이 필요한데, 그 물은 연적(硯滴)에 담아 방울방울 떨어뜨린다. 이 도자기 연적 또한 예술이다. 나는 서예는 아니지만 붓글씨를 써 보려다 ‘펜글씨나 잘 쓰자’로 바꾼 지 오래다.
먹을 만들 때는 소나무를 태워 그을음을 쓰기도 하지만, 유연묵을 만드는 데 쓰는 ‘호마유’는 참기름이다. 참기름을 태워 그 그을음을 모아 아교를 녹인 물에 부드러운 그을음 가루를 섞어 걸쭉해지면 재를 넣어 모양을 잡아 먹을 만든다. 아교는 민어의 부레풀을 쓴 것이 고급이며, 접착제로 사용된다. 또한 향료나 약재로 쓰이는 용뇌(龍腦), 사향(麝香), 장향(藏香) 등을 먹에 소량 첨가해 향기를 내고 품질을 높인다. 이러니 먹을 검다고 얕볼 수는 없다.
자연적인 먹물은 오징어가 뿜는 먹물이다. 검은 물질로는 보리깜부기, 숯, 검댕, 석탄 등이 있다. 숯(炭)은 나무나 물질을 불완전 연소시켜 만든 고체 탄소이고, 검댕은 기름이나 나무 등이 탈 때 생기는 미세한 탄소 입자로, 가볍고 부드러운 가루 또는 먼지다. 요즘 인기 있는 오징어 먹물로는 먹을 만들지 않는다. 오징어 먹물은 몸에 좋다고 하여 익혀 먹거나 빵을 만들어 먹는다.
먹물의 색깔처럼 새까맣지 않고, 자연스러운 검은빛을 ‘먹색’이라 한다. 이 얼마나 고급스러운 색인가. 여기에 빨강이나 파랑을 2%쯤 섞으면 놀라운 ‘묵적(墨寂)의 먹적’, ‘먹청’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유명 화가를 기리는 박물관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먹으로 그린 그림인지 잉크로 그린 그림인지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만년필에는 잉크를 넣지, 먹물을 넣지는 않는다. 잉크는 만년필이나 펜으로 쓰고, 먹물은 단연코 붓으로 쓴다. 물론 먹물을 펜으로 쓰거나 잉크를 붓으로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묵화(먹으로 그린 그림) 옆에 영어로 “잉크로 그린 그림(ink painting)”이라고 적혀 있었다. 먹이 잉크이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먹’을 그냥 ‘Meok’이라 하면 안 될까?
개성에서 길러지고 금산의 특산물인 우리 인삼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면서 일본어 ‘긴센(人蔘)’을 닮은 ‘진생(ginseng)’이 되었듯, 우리 바둑 역시 백제 때 일본으로 전해졌다가 일본을 통해 미국에 전해지면서 영어로 ‘바둑(棋)’의 일본식 발음인 ‘고(go)’가 되었다.
먹은 Chinese ink, Japanese ink, Korean ink로 구분되지만, 일본어 ‘스미(墨)’에서 따온 영어 표현인 ‘Sumi ink’가 더 많이 쓰이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 것은 우리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문화와 예술은 당당해야 빛이 난다. 먹은 우리말이고, 우리 색이며, 잉크가 아닌 ‘먹(Meok)’이다.
먹은 또 하나의 ‘먹거리’다. 먹으로 우리의 문화적 영토를 넓혀 나가자. 먹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 출처 : FRANCEZO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