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치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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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치페이

0 개 559 이경자

“할머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오늘은 제가 쏠께요.” 어찌하다 잠시 한 지붕을 쓰게 된 한국에서 온 예쁜 아가씨다. “에휴, 네가 사는 밥을 먹고 소화가 되겠니?” 하긴 그렇다고 매번 내가 사기도… 우린 며칠새 여러군델 다녔다. 미션베이도 가고 배타고 데본포트도 다녀오고, 좀 먼 수목원, 박물관도 갔었다. 뉴질랜드가 처음인 그녀는 이곳이 그저 신기하고 좋은가보다. 버스타고 하버다리를 건널 땐 벌떡 일어나 다리아래 요트 정박장을 사진찍어 들여다보며, 또 전송도 한다. 사진찍기도 좋아하지만 찍히기도 좋아해서 본의 아니게 내가 찍사노릇도 하곤 했다. 하긴 신기하기도 하겠지. 한국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풍경이니까… 내가 마뜩찮아 하자 눈치챈 그녀는 “할머니 그럼 더치페이 해요.” 아! 그런 방법도 있긴 하지만 정말 익숙치 않은 제안이다. 


이민 초기 이곳에 와서 식당을 개업했던 어떤 이가 있었다. 그는 “참 별일이에요, 연인인듯 둘이 팔짱끼고 들어와서는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식탁위에 서로의 손을 깍지끼고 눈으로 말하던 이들이 계산은 각자 하대요.” 그럴리가…하지만 그땐 그저 문화의 차이인가 하고 웃고 지나갔는데, 더치페이, 요즘엔 그렇게 놀랍지도 않은 단어가 되었다. 


그래 일단 나가자. 그녀에겐 뉴질랜드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이미 정해져 있어 조급하기도 하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냥 집에 있으면 뭔가 손해보는 것 같은 그런 전형적인 뉴질랜드의 여름날씨. 느긋한 마음으로 상가구경을 하며 퀸 스트리트를 걸어서 바이덕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여기에서 오래 살았지만 몇번 와보지 않은 곳이다. 그저 오늘처럼 한국에서 손님이나 와야 오는 곳… 유람선이 들어왔는지 인산인해의 사람들이 쏟아져 내린다. 바-나 레스토랑은 이미 만석이고 도통 마땅한 자리를 잡기 힘들다. 될 수 있으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 그녀를 앉게 하고 싶은데…


푸른 하늘엔 유람선이 싣고 와서 이제 막 풀어놓은 듯 셀 수 없이 많은 바닷새들이 반짝이는 햇볕을 등에 업은 채 하늘을 날고 있다. 어딘가에선 밴드의 생음악도 들려오고 그야말로 축제다. <Pride of Auckland> 라는 현판의 문귀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뉴질랜드가 동화속처럼 살아 움직이고 있다. 쿡 찌르면 파란물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과 흰구름을 한점씩 떼어내어 봉투에 담고 싱그러운 바람 한줄기와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바닷물 한웅큼, 크고 작은 요트등을 그대로 한 봉투에 담아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을 고국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런 풍경. “할머닌 좋으시겠다, 이런 데 사셔서…” 사진을 찍고 찍히며 행복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크게는 말 못하고 웅얼거리듯 “그렇지 않은 때도 있단다 얘야! 곧 뒤따라 겨울장마도 오거든…”


간신히 자리잡은 멕시칸 레스토랑에선 좀전에 나간 손님의 흔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우린 그 옆에 서서 기다렸다. 멕시칸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여종업원에게 추천을 부탁했고, 그 요리들로 주문했다. 거기에 덧붙혀서 우리 아가씨가 생맥주 두 잔을 추가했다. 술이 별로인 나는 더운 날씨에 술을 마시면 더 더워지던데… 더운건 우린데 맥주 잔이 땀을 흘리고 있다. 보기엔 뭐 시원해 보이긴 하네…그녀는 목울대를 꿀럭이며 “할머니도 드셔보세요.” 한다. 요리가 미쳐 나오기도 전에 거의 빈 그녀의 술잔을 아직 입도 안댄 내 몫의 술잔과 바꾸어 놓는다. 그리곤 너어무 맛있어요 하는 표정의 그녀에 동조하기 위해 남은 맥주로 입술을 적신다. 


참고로 나의 주량은 두꺼비 그려진 초록병의 이슬 한 종지이다. 모여있는 이들이 아주 격의 없이 편안하게 어울리고 행복하면 이슬 두 종지…? 과음이다. 말이 많아지고 웃음이 헤퍼진다. 요즘엔 그나마도 드문 일이지만 그녀는 내가 마신 두종지의 이슬을 마신 것과 같은 취기와 같은가보다. 멀리서 도개교가 들어올려지고 아득하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치는 박수소리가 들린다. 첨 보는 이들은 신기하기도 하겠지. 


옆자리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키위 네 명이 앉아 웃고 얘기한다. 그들은 시작한지 좀 된 듯 탁자위엔 이름모를 요리와 마시다 만 와인잔과 맥주잔이 놓여있고 얼굴들이 하나같이 발크레하다. 내 짐작에 오래 묵은 친구들인 듯 웃고 담소하는데 격의없고 여유로워 보인다. 그 중에서도 목이 시원하게 파인 커다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숙녀분과 눈이 자꾸 마주친다. 그이도 나처럼 이쪽을 자주 보는 듯 눈이 마주치면 특유의 눈웃음으로 화답한다. 차암 곱게 늙었다. 그녀는 별로 조화롭지 않은 우리가 신기한 듯 우리를 자꾸 쳐다본다. 키 작고 많이 낡은 동양 할머니와 아가씨가 대낮에 술을 마신다. 나도 그들을 구경한다. 민망하게 최소한의 옷만 걸친 오가는 이들을 보는 것보다 원피스로 멋을 낸 여인을 보는 걸 내 눈이 익숙해 한다. 


바이덕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로얄석을 거져 내놓기 아깝다 생각할 즈음 옆자리의 손님들이 먼저 일어난다. 그리곤 나란히 계산대로 가더니 각자의 카드를 꺼내들고 차례를 기다린다. 맨뒤에 서있는 청일점의 신사까지 아! 고 더치?


나도 나누어 내기로 한 모임이 몇팀 있다. 대부분 나보다 훨씬 젊은, 말하자면 내가 음식값을 지불하는 것 보다 얻어먹을 확률이 높은 팀들인데 나의 제안으로 더치페이를 하기로 한 후 벌써 여러번의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 저 모임에서 더치페이를 제안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그들이 나에게 더치페이를 하자는 말이 쉽지 않을 것 같아 서둘러 제안했다. 모두들 동의했다. 그래도 식후 커피를 한다던가 다른 경비가 발생하면 또 아무래도 젊은이들이 부담하기도 한다. 우린 서로 만나고 싶으면 부담없이 “밥먹자” 하고 당당하게 주문한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더치페이가 어색하다. 얼마전 친구 셋이서 점심을 먹은 후 돈을 내야 하는데 계산기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늦어지며 한참을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한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얼굴이 달아올라왔다. 나는 뒷편에 서있다가 내 몫의 요금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먼저 나와버렸다. 한국의 묵은 정서에 길들어 살아왔고 그 정서를 그대로 끌고 태평양을 건너온 할머니는 이래도 편치 않고 저래도 꼭 행복하지만은 않다. 식대는 알뜰하게 나누면서 이 먼곳까지 픽업을 오고 늦은 시간에 헤어질 땐 밤길이 위험하다며 집까지 데려다주는 이 수고는 어쩔텐가? 


그래도 보고 싶을 땐 입에 손나팔을 만들어 “밥먹자아” 하고 크게 외친다. 나눠 내기는 사람을 당당하게 만든다. 어쩜 밥먹자는 말은 저간에 더치페이를 깔고 앉아 있기도 하지만 보고 싶다는 또 다른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들어와서 영수증을 챙겨보니 생각보다 비싸고 술값은 겨우 맥주 두잔인데 만만찮다. 또 서비스 수수료가 이렇게 비싼줄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는 반으로 나뉜 금액을 현금으로 그녀의 핸드백 위에 올려놓는다. 둘이는 어쩐지 요리가 맛있더라니 하며 다음에 또 그 요리를 먹기로 하고 이름을 외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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