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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0 개 605 수필기행

누가 왔었나?


마당이 어수선하다. 담벼락으로 기어오르던 호박은 넝쿨째 떨어져 뒹굴고 텃밭 고추는 밭고랑에 드러누웠다. 휘어지게 열매를 키우던 자두나무 큰 가지도 꺾이어 우물가로 내려앉았다. 생기롭던 뜰이 밤사이 상처투성이로 변해버렸다. 예보했던 태풍이 다녀간 모양이다.


널브러진 마당을 제쳐두고 농장으로 내달았다. 낙과 피해는 없을까, 쓰러진 나무는…. 사열관의 눈빛으로 천여 그루 사과나무를 찬찬히 살핀다. 강풍에 시달려 후줄근할망정 제 자리를 지키고 선 모습이 개선장군 같다. 농장의 나무들은 잘도 버티었는데 뜰 안의 자랑이던 자두나무가 팔 하나를 잃고 기우뚱 서 있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단물 든 열매들은 쓸리고 패어 말짱한 것 하나 없다. 내 짐은 줄이고자 안간힘을 쓰면서 과일은 많이 열수록 좋아서 제대로 솎아주지 않은 탓이다. 과욕이 화근이다. 바람기 남아 있는 마당에서 상처 난 자두를 주워 모으며 지난봄 남편에게 들이친 바람을 생각한다.


“폐 쪽에 종양이 있대.”


혈압약을 처방하던 의사 권유로 X-레이에 CT 촬영까지 받고 온 날, 남편이 남의 얘기하듯 전한 말이다. 의사가 소견서와 CD를 주면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란다. 연초에 받은 종합검진 결과가 모두 ‘정상’인 멀쩡한 사람에게 폐종양이라니. 석 달 전에 받아놓은 검진 결과지를 확인하며 나도 남의 얘기를 듣는 듯 믿기지 않았다. 오진이겠지. 혼란한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남편은 친구와 닷새간의 여행을 떠났다. 예정된 일정이니 다녀와서 확인하자면서. 삶이란 한 치 앞을 모르는 수렁이다. 혼자 남아 병원을 수소문하며 괜찮을 거라는 주문을 수없이 외면서도 커지는 불안을 누를 수가 없었다.


남편은 가끔 문자를 보냈다. 어딜 다녀왔는지 무얼 먹었는지. 전에 없던 친절이 반갑지 않았다. 예약한 대학병원에서는 진료할 의사와 시간, 준비할 것들을 수시로 알려왔다. 자상한 안내가 미덥고도 불편했다. 담당의의 이력을 살피고 폐종양에 대한 예후와 증상을 검색하느라 컴퓨터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진료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아니, 시간 보낼 뭔가가 필요했다. 기대고 싶은 마음을 위로받을 곳 하나 없는 외로운 신세라니. 살려 달라 떼쓰며 매달릴 믿음직한 동아줄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나는 여태 무얼 하고 살았던가.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병문안 오는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축하한다며 손을 잡았다. 비명을 참으며 견뎌낸 몸이 제자리 잡기까지는 한참이 지나야겠지만 높은 산 하나를 넘은 듯 거뜬했다.


“자네가 너무 깔끔해서 그래. 이런 청정지역이 있었구나, 편하게 자리 잡았지 뭘.”


병문안 온 친구의 농담이다. 종양도 깨끗한 토양을 좋아해서 자신처럼 줄담배에 말술도 거뜬한 사람 장기에서는 있던 놈도 못 견디어 달아날 거라고도 했다. 퇴원하면 데리고 다니면서 단련시켜야겠다는 농담에 한바탕 웃었다. 웃음소리와 웃는 모습이 처음인 듯 고마웠다. 수술 후 일주일을 병원에서 지냈다. 오월의 강풍이었다.


태풍 설거지로 한나절을 보내며 생각한다. 다 익은 열매를 떨구고 마당을 휘저은 것은 태풍인가 무관심인가. 밤새 불어 닥친 바람에도 농장은 끄떡 않는데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은 성한 곳이 없다. 농장이 온전한 것은 넉넉한 거름으로 과감한 열매솎기로 욕심을 덜어낸 덕분 아닐까. 사람 몸은 칠 할이 종양을 지니고 있고 면역력이 약해지면 그것이 병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남편의 면역력을 떨어뜨린 바람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한다. 울안 나무처럼 짐이 무거웠던 것일까. 농장 나무들처럼 정성을 기울이지 않아서일까. 집안을 흔든 바람은 아직도 잔물결을 일으키며 을러댄다. 있을 때 잘하라고.


잃어봤기에 있음의 소중함을 실감하는 날들이다. 더 큰센바람이 불어와도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울타리를 마련해야겠다. 바람은 멈추지 않을 테니까.


■ 최 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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