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여동생의 시어머니께서 며칠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룬 이후로 제부는 매일 어머니께 다녀온답니다. 그러면서 엊그제 혼자 밖에 나가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사 온 것을 보면 어머니의 빈자리가 무척 컸던 거 같습니다.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친정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외삼촌께서 갑자기 돌아가신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아서 그때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으셨는데, 젊으셨을 때부터 친구였던 그분까지 떠나셨으니, 은근히 걱정이 되더라고요.
내 예상대로 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기운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이별에 대한 슬픔으로 목이 꽉 잠겨 계시더라고요. 팔순을 넘기신 어머니로서는 가까운 분들의 죽음이 남의 일로 보이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사돈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첫 날과 달리 오늘 어머니의 목소리는 좀 괜찮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마음이 많이 안정이 되신 거 같군요. 시간이란 것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치유를 해주는 효과도 있네요.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버릴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돈은 나에겐 이모보다도 더 가까운 분이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분의 부고 소식은 이별이란 커다란 슬픔으로 내 가슴을 꽉 채우더군요. 그러다가 장자가 자기 부인이 죽었을 때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춘 것을 읽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장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친구에게 장자가, 자기도 물론 슬펐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삶과 죽음은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같고, 삶과 죽음이 두 가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물의 두 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슬픔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장자는 부인의 죽음을 통하여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며 죽음에 초월하게 된 것입니다.
장자처럼 나도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생각하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은 없습니다. 그런데다 영혼의 불사를 믿기에, 죽음이란 단지 육신의 옷을 벗고 영혼이 여행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으로 여기기에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장자처럼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게 기괴하지 않군요.
그런데 죽음이 이별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이별 역시 만남이기에, 제부가 어머니와의 이별로 뻥 뚫린 가슴에 강아지 한 마리를 채워 넣으려고 했었을 겁니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새로운 만남을 이루게 한 것이지요. 하지만 강아지가 어머니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겁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기에, 인연 역시 마찬가지로 만남과 이별이 함께 존재하는데, 장자처럼 이분법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다행히 시간이란 것이 있어, 이분법적 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이별이나 죽음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넓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생을 통하여 제부가 어머니께 다녀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릿합니다. 며칠이라도 아프셔서 병간이라도 할 수 있었던지, 돌아가실 것을 예측하여 마음의 준비라도 해두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덜 힘들 수도 있었겠지요. 어찌 보면 복이 많으신 분이신데, 자식 입장으로서는 그렇지 못하겠지요.
그래도 강아지가 새 식구가 된 것은 제부의 새로운 의지이기에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강아지가 많이 희석을 해주어 새로운 웃음꽃이 피어났으면 좋겠군요. 곧 그렇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