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대학교에는 커다란 잔디밭이 있었다. 오월의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광장이 가져다주는 어떤 암울한 느낌을 5월이라는 봄 냄새 가득한 단어로서 상쇄시켜주는, 마음에 드는 이름의 장소였다. 5월의 광장에선 낮에는 막걸리 혹은 맥주를 마시고, 맥주 혹은 소주를 마시는 밤이 있었고, 한국의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목청 높여 게임을 했고 아파서 청춘이든 안 아파서 청춘이든 그리 나빠 보이는 광경은 아니었다. 사실 사람만한 곰팡이가 사는 반지하 자취방이나 낮이나 밤이나 어두침침한 술집보다는 좀 더 낭만적이지 않는가.
그들 무리 가운데서 유독 튀는 부류들이 있었으니, 조금 더 길쭉길쭉하고 조금 더 칼라풀한 옷차림새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국으로 온 외국 교환학생들이었는데,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조용히 누워서 자거나 책을 보거나 했다. 그 시끄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책으로 보고 잘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속으로는 아, 부럽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아, 부럽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서양간지니, 양놈허세니 하고 그저 맥주나 막걸리를 마시며 놀았다. 만약에 그렇게 했더라면 누군가는 분명히 우릴 보고 허세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허세라고 부르는 이면에는 시기와 질투와 더불어 체면이라는 핵심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체면은 자신을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때때로 사회를 조용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자제시키는데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체면은 모두를 남들과 똑같이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이 있다. 누군가가 코를 멋지게 세운다면 그 사람과 같이 길을 걸어갈 때 자신의 체면이 조금 위태롭다고 느낀다. 자존심마저 위협받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코가 높은 사람과 함께 걷는 코가 낮은 사람을 보는 인파들의 시선을 때때로 의식한다.
그렇다면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보는 것은 왜 따라하지 않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다수가 그것을 허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한국에서는 선글라스도 마음대로 못 낀다며 불평한다. 허세라며 주위에서 수군대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면 한국인들 대부분은 사대주의자에 귀속되어 있으면서 사대주의자가 되길 거부한다. 이런 코쟁이 문화 콤플렉스가 다분히 묻어있는 것이 앞서 나열한 허세라고 불리우는 상황들이다. 딱히 선글라스를 끼든 맨발로 다니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인데, 아직도 한국에서는 머리를 조금 기른 남자들에게 꼬추 떼뿌라!를 외치는 노인들이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들과 옆과 뒤도 볼 줄 아는 세대들.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없는 가운데 극명하게 다른 이 두 세대들이 동시대를 살면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일 수도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고작 체면과 시선 때문에 두려워 하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서 자존감이 사라지고, 그로 인해 남에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해서만 집착을 하게 되는 사회는, 그저 껍질뿐인 사회일 것이다. 물론 과도기적인 현상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고 앞으로 한국도 청년과 노인을 아우르는 공동의 문화가 생길 것이지만- 어찌되든 한국을 오랜 시간동안 지켜온 체면이라는 것의 실체가 사실 정말 허세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체면은 자신만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허세는 때때로 모두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