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馬)이야 막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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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馬)이야 막걸리야

0 개 1,898 피터 황

구불구불한 골목의 끝에 다다라서야 간판도 없는 피맛골의 전봇대집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 투박한 양푼에 담긴 막걸리와 이면수구이 한 접시가 자동으로 나온다. 낮은 나무천장, 울퉁불퉁한 시멘트 바닥에 놓인 철제의자, 시간이 맞는 게 신기한 낡은 벽시계. 비오는 날이면 축축해진 청춘들이 대학생이란 신분의 무기력함에 텁텁한 막걸리에‘민주와 자유’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달래곤 했다. 술값이 없어서 맡기고 간 시계와 학생증이 가게마다 바구니에 꽉 찼다. 젓가락으로 잡아 끌면 길게 늘어지는 뜨거운 파전에 입천장이 데어도 똑바로 살아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가를 토로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서로 위로 받고 다시 힘을 내곤 했었다.


광화문에서 종로 6가까지 이어지던 피맛골은, 조선 시대 서민들이 지체 높은 양반들에게 땅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대로변을 피해, 뒤로 돌아다니던 골목길이었다. 말(馬)을 피해 다니던 길이란 의미의 ‘피마(避馬)’에서 유래된 백성들의 길, 사람의 냄새가 켜켜이 배어 있던 뒷골목이다. 그러니 그곳에 막걸리와 함께 선술집과 국밥집들이 즐비했던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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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잔은 약간 이가 빠진 사기 사발이면 금상첨화다. 역시 막걸리의 텁텁하고 통쾌한 맛을 위해서는 사발에 벌컥거리며 마셔줘야 한다. 와인처럼 잔에 절반쯤 담아서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마시는 것과는 달리, 막걸리는 넘치게 따르고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단숨에 들이켜야 하는데 목울대를 요동시켜 넘어가는 소리가 꿀커덕 꿀커덕 바깥으로 나와줘야 제격이다. 통 크고 호기롭게 냅다 들이붓고는 미련없이 사발을 입에서 떼네어 소반에 텅 소리를 내며 내려놓아야 한국인이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혀의 어떤 부분에 얼마나 넓게 접촉하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막걸리사발처럼 큰 잔에 마시면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지면서 혀에 닿는 부위가 넓어져 맛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다. 혀끝은 단맛과 짠맛을, 혀의 양 옆은 신맛을, 혀의 가장 안쪽 끝에서는 쓴맛을 느끼게 된다. 조물주의 완벽한 디자인 덕분에 음식의 조화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막걸리의 맛은 다섯가지다. 단맛과 신맛 그리고 탄산의 톡쏘는 매운 맛, 알코올에서 느껴지는 쓴 맛, 구수한 떫은 맛이다. 한국의 막걸리는 세계화에 손색이 없는 맛과 영양, 역사성, 가격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일반 주류와는 달리 많은 단백질과 당질이 들어있고 유산균, 비타민, 식이섬유 등 영양소들이 가득하다. 특히 지방분해에 좋은 트립토판과 항암물질인 파네졸을 함유하고 있어 맛과 건강을 모두 잡을 수 있는 그야말로 웰빙 술이다. 


막걸리의 영양소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은 먼저, 발효되고 남은 당분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이다. 다음은 아미노산이나 식이섬유에서 느낄 수 있는 텁텁함, 그리고 이산화탄소에 의한 톡 쏘는 맛이다. 마지막은 새콤함이다. 새콤한 맛은 초산균이나 유산균 등 각종 미생물들이 만들어내는 유기산에 의해서 생겨난다. 막걸리는 와인처럼 발효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깊고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밖에도 막걸리를 만드는 다양한 재료에 의해서 맛의 변신을 꾀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배들이 마시던 양은주전자에 담기던 막걸리가 캔이나 예쁜 병에 담기고, 시큼하고 텁텁한 맛은 과일과 곡류의 향으로 깔끔하게 변신함으로써 후배세대들에게도 한국의 전통주가 현재까지 발전되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생으로 보자면 40세, 올해로 불혹(不惑)이 된 광주 민주화 운동. 대한민국 대표 민중가요를 꼽으라면 단연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닐까? 민주주의 역사의 현장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해서 시민들의 힘을 모아주고 언제 어디서 어떤 맥락으로 불러도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을 메이게 하는 노래다. 시대적 배경과 희생된 노동운동가들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었다는 사연을 알지 못해도, 듣고 부르는 순간 그 정서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고 투박하지만 날 것의 진정성이 있다. 


간판도 없이 막걸리와 생선구이를 팔던 피맛골 전봇대집을 우리끼리는 와사등(瓦斯燈)이라고도 불렀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시대, 우리의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고독감과 비애감에 가득차서 한 가닥 희망처럼, 가스등이 켜진 어두운 뒷골목의 구석진 술집을 찾아 들어온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그날의 주인공들이 떠나버린 피맛골은 이미 과거의 흔적과 장소성을 상실한 채 영혼 없는 콘크리트 빌딩 안에 자리잡았지만, 새로운 생활방식의 현재에 전통을 지킨다는 이유로 무작정 불편을 강요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이해한다. 


더욱이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라떼는 말(馬)이야(Latte is horse)’ 식의 쓴소리보다는 오히려 요즘 세대는 칭찬으로 더 발전하는 세대다. 지금의 세대는 ‘앞서서 나가는 자’를 굳이 따라가야 할 필요도 없고 한치 앞의 계획도 힘든 예측 불가의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막걸리의 어원이 ‘술통 아래로 가라앉은 곡물의 술지게미를 막 걸러서 마신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니 혹시라도 누군가에게서 생각을 거르지 않고 막 뱉아낸 말을 들었을 때, ‘말(馬)이야 막걸리야’ 라고 호기롭게 응대하고 사발에 넘치게 담긴 시원한 막걸리 한잔 하는 것이 막말과 망언의 시대를 살아가는 적절한 대처법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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