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을 말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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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을 말리면서....

3 3,953 왕하지


딱, 딱, 딱, 너무 두껍게 썰으면 잘 안 마르고 너무 얇게 썰으면 바람에 날아가고 알맞게 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호박을 써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집안에 울려 퍼지자 아이들이 나와서 물어본다.

“아빠, 뭐해? 요리해?”

호박나무를 한 20그루 심었더니 한인 몇 집을 나누어주고도 호박이 남아 말리기 시작했다. 호박냄새가 달고 너무 맛있다. 겨울에 볶아 먹으면 얼마나 맛있겠는가, 꼴깍~

따뜻한 햇볕에 호박을 말리다보니 젊은 시절의 한 친구가 떠올랐다. 내가 집을 사기위해 열심히 저축하고 있을 때 그 친구도 열심히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훨씬 많았다. 허풍떨기를 좋아하고 워낙 씀씀이가 크다보니 그의 주변에는 허풍을 들어주며 얻어먹는 친구들이 항상 있었다. 그들은 누가 얻어먹어도 얻어먹는 것은 마찬가지라면서 아예 허리띠 풀어놓고 먹어대는 친구들이었다. 나는 매번 얻어만 먹는 것이 미안해 가끔 사양도 할 줄 아는 꽤 양심적인 편이었다.

“내 나이 30에 방3칸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성공한 거 아니야, 우리 마누라가 산거지만 어차피 집을 샀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성공 한 거지 뭐, 안 그래? 자 한잔씩 쭉 들자고~”

그 친구는 일만 한건 성사되어 계약금을 받으면 술집으로 향하곤 하였다. 돈을 모두 써버려 일을 진행 못하면 부인에게 손을 벌리곤 했는데 납품하면 받을 돈이 있기 때문에 부인이 속더라도 돈을 만들어주곤 하였다. 그런 그에게도 부인이 좋아하는 착한구석이 있었다.

그 친구는 일요일 날 만큼은 친구들과 약속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재미난 일이 있어도 일요일만큼은 부인을 위하여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부인은 편하게 누워 TV나 보게 하고 설거지하고 밀린 빨래도 하고 청소하고 커피도 끓여주고 안마까지 해주는 완전 봉사하는 날인 셈이었다. 일요일만큼은 부인을 위해서 살자, 나머지 6일은 개차반으로 살지라도... 이런 확실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남자가 빨래하고 밥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이었는데 정말 대단한 친구였다. 천호동에 그런 자상한 남편이 있다는 것이 온 동네에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은 성내동인 우리 동네까지 퍼질 정도였다. 많은 부인네들이 그 친구 부인이 부러워 미치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어느 날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을 한건 계약했다면서 당장 술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안 간다고 해도 악착같이 전화질을 해서 가보니 꽤 비싼 술집이었는데 얻어먹는 친구들은 옆에서 낄낄거리며 양주를 빨고 있었고 그 친구는 웨이터들을 세워놓고 일장 훈계를 하고 있었다.

“야, 이 따식들아~ 나 같은 VIP 손님을 모시는 태도가 그게 뭐야, 서비스정신이 싸가지가 없네, 내가 말이야 갖은 게 돈 밖에 없는 사람인데, 너희들 나를 우습게 봤어, 이 따식들~”

그 친구는 돈뭉치를 안주머니에서 꺼내더니 홀에 쫘악 뿌려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쳐다보고 친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나는 한 푼이라도 없어 질까봐 열나게 돈만 주워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물었다.

“돈 뿌리는 내 모습 폼 났지? 큭크, 근데 없어진 돈은 없지?”

“니미, 몇 장 없어진 것 같은데...”

어느 날 밤, 그는 TV와 비디오를 짊어지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거래처로부터 압류가 들어온다고 숨겨 달라면서 집은 부인 거라 끄떡없다고 낄낄거렸다. 그는 그 후 강남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내 곁에서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지금쯤 그 친구는 무얼 하고 있을까? 전원주택에 살면서 여름이 되면 나처럼 호박이나 썰어 말리고 있을까? 아니아니, 필시 그 버릇을 못 고쳐 이혼당하고 쪽박 찼을지도 모르지, 아니야, 화끈한 성격에 한몫 잡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만약, 그 친구가 호박말리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뭐라고 말할까?

“어라, 일요일만 호박을 말리는 게 아니라 나머지 6일도 호박만 말리고 있네, 한국으로 수출하려고? 별꼴~”

그럼 나는 마른 호박 한 봉지를 잔디밭에 쫘악 뿌리는 거야, 그리고 묻는 거야, 내 모습 폼 났니? 빠짐없이 주워라 이놈아,

바람이 분다. 얇게 썰어진 호박은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간다. 마치 지폐가 날아가듯이...
오키씨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늘 특유의 글냄새가 있어 정겹고 소박하니 좋답니다.^^늘 애써주세요,
왕하지
오키씨님에게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왕가레이까지 퍼지는 군요.
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달중이
ㅋㅋㅋ 하지님, 너무 재미있어요 ^^ 마른호박 한봉지를 확 뿌린다고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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