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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타탕”
어쩐지 오늘은 별 탈 없이 지나가나 했던 공동체 식사가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좁은 입구, 협소한 공간에서 나누어지는 공동 식사의 긴 줄은 때로 나누어진 음식의 양에 따라 서로 아귀다툼이 일어 쉽게 엉클어지곤 했다. 아마 배식을 하던 자원봉사자와 음식을 받는 주민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 난 것 같았다. 서로의 욕지거리가 한번씩 주고 받아진 다음 접시가 테이블에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 그대로 상황이 진정되지 않으리란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음식이 담긴 그의 접시가 허공을 나르고 있었다.
지금은 정기적인 저녁 식사가 제공되고 있지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이곳에선 수요일 점심에 나누어지는 공동식사가 한 주간을 통틀어 약속된(?) 유일한 끼니였다. 아침 일찍 도착한 푸드트럭과 슈퍼마켓을 돌며 얻어 온 식료품으로 그날의 점심을 준비하는 손길은 언제나 바빴고 그 끼니를 기다리는 이들의 기다림도 유난히 긴 수요일 아침 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때 보다 조금은 더 긴장이 높은 그 시간을 잘 넘겨야 하는 숙제를 우리는 항상 안고 있었다.
하루 세 번, 보통의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는 일상의 끼니를 거르는 일은 드물다. 간혹 음식에 손이 안가거나, 바쁜 하루로 잠시 미루어지는 점심 정도가 우리가 거르는 끼니의 대부분이 아닐까? 삶의 질을 걱정 할지언정 배고픔의 두려움을 이야기 하지 않는 우리에게 하루 세 번 들려오던 뱃속의 자명종은 이제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마치 배고픔이 우리 세상엔 존재 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배고픔의 고통은 우리이웃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이들에게 배고픔은 여전히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매일매일 해결해야 하는 숙제로 남는다.
뉴질랜드 첫 락다운이 시행되던 지난해 가을, 지역사회에서 간헐적으로 제공하던 모든 급식이 갑작스럽게 중지된 마을은 혼란스러웠다. 낮은마음이 운영 하는 푸드뱅킹이 마을의 일부에게는 유일한 식료품 공급원이 된 것이다. 조금의 여윳돈이 있는 이들은 그나마 작은 장바구니를 채워 돌아 올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힘든 이들은 나누어지는 음식 없이 때론 며칠씩을 견뎌야 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정신적 장애로 스스로를 돌볼 수 없었던 몇몇은 실질적 기근 상태로 4일을 넘게 보내야 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을 수 있었다.
더 많이 움직여야 했었다. 나 스스로도 안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고픔은 생각보다 가까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
이 경험은 지금도 이 사역과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풍요의 소음 가운데 숨죽인 그들의 신음은 여전히 우리 속에 들려오고 있다.
“와장창창”
허공을 나르던 그의 접시는 기어이 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그대로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 거리며 부엌을 나가는 그의 커다란 등뒤로 길게 늘어선 줄의 시선들이 일제히 담긴다. 산산이 조각 나 버린 그의 접시는 어쩌면 세상을 향한 그의 대거리는 아니었을까? 이정도 소란이야 세상의 거대한 풍요의 소음 앞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겠지만 나는 분명 그의 분기가 쏟아낸 작은 신음을 들을 수 있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음식물과 유리조각들을 모으면서 나는 그의 부서진 마음이 함께 모아지기를 바랬다. 그 날카로운 조각들은 산산이 부서진 그의 가슴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