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의 화장化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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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의 화장化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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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할 때 남자는 지갑을 챙기고, 여자는 화장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결혼 생활 수십 년에 이 말이 남녀 특징의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두둑한 지갑은 잘 벼린 기사의 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칼이 없는 기사가 낭패를 보듯 근사한 식당에서 얄팍한 지갑 때문에 쩔쩔 매는 꼴은 두고두고 빈축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무엇 때문에 화장을 하는 것인가. 나는 수십 년간 주위의 여인들, 이를테면 어머니, 여동생, 아내 등이 화장하는 것을 보며 으레 여자들은 그러려니 여겼다. 그런데 수년 전 아내가 환갑을 넘긴 나이에 외출을 앞두고 거울 앞에서 분주히 손을 놀리는 것을 보다가 왜 화장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내는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살짝 눈을 흘기더니 별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꽃처럼 보이기 위해서이겠지’라고 혼자 생각했디. 하지만 여자의 화장은 남자의 지갑과 달리 경우에 따라 무언의 소망이나 질책이 될수도 있다는 것을 지난 가을에 알게 되었다.

 

지난여름,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중병을 치렀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첫번째 것은 기흉이었다. 늦은 오후, 고향의 동생에게서 노모의 숨이 갑자가 가빠졌다기에 대구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모셔오게 했다. 다행이 당직 의사 중애 흉부외과전문의가 있어서 폐에 생긴 공기주머니에 튜브를 꽂는 시술을 바로 할 수 있었다. 치료가 늦을 경우, 부픈 주머니가 심장을 압박하여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서두르길 잘 했다는 생각과 함께 졸았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입원과 통원치료를 하며 2주 정도 지나자 어머니의 숨쉬기가 정상이 되었다. 한시름 놓고 있는 중에 느닷없이 대상포진과 척추압박골절이 동시에 왔다. 그간 여러가지 주사약과 병원에 오가야 하는 힘든 운신이 무리가 된 듯 했다. 척추의 압박골절은 등뼈 마디 중 어느 곳에 유리에 금이 가듯 균열이 생긴 것이다. 대개의 경우 약용 시멘트 주사로 간단히 치료가 되나 어쩐 일인지 어머니에게는 그 시술이 불가능하다며 저절로 아물 때까지 절대로 안정해야 한다는 처방을 했다. 

 

집에 계신 노모는 거의 하루 종일 누워계셨다. 보름 넘게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없어 방안에 변기를 들여 놓았다. 독한 진통제 때문인지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말까지 어둔했다. ‘이 고비를 넘기실 수 있을것인가.’ 조마조마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가을철로 접어들자 조금씩 기운을 차리시더니 어느 날 아침 방문을 빠끔히 열고 보니 노인은 이미 세수를 마치고 머리를 빗고 계셨다. 검게 염색했던 머리칼이 하얗게 바뀌고 있었다. 노모는 이참에 아예 염색을 하지 않고 제 색깔 그대로 두실 작정이었다. 특별히 누구를 만날 일도, 어디에 나갈 일도 없는데 귀찮게 화장을 할 일도, 머리 단장할 일도 없다는 말씀이었다. 일주일 뒤쯤, 거동이 더욱 편해지자 어머니는 갑갑한 아파트를 뒤로 하고 고향집으로 가셨다. 그곳에는 십여년 전 낙향한 동생가족이 포도농사를 지으며 줄곧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추석이 가까운 어느 날, 의정부에사는 큰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편찮았다’는 소식을 늦게 들었다며 명절 연휴 때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로 찾아 뵙겠다는 연락이었다. 대구의 작은 딸 식구들도 함께 갈 예정이라며 점심식사를 할 식당의 예약을 부탁했다. 두 딸 모두 맞벌이부부라 평소에는 시간 내기가 어려운데 명절인사 겸 때늦은 병문안을 한다기에 늦었지만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딸네 부부들은 결혼 직후와 첫 애기의 돌 때, 그리고 집안의 행사 때 등 간간히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지만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뜸했다. 그 사이 나의 손주는 초등생, 유치원생 등 모두 네 명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와 우리 부부, 동생 부부, 딸네들 부부, 손주 등 열서너 명의 점심식사를 교외의 번듯한 식당에 예약했다. 마침 동생의 포도밭이 식당근처여서 식사 후에 손주들과 함께 모두 그곳에 들려보기로 했다.

 

모두 당일에 시골집에 가자 어머니는 이미 외출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계셨다. 첫눈에도 평소와 다르게 몸단장을 하신것을 알 수 있었다.  단정히 빗은 앞머리에는 초승달처럼 생긴 큼지막한 자수정 빗을 꽂았고, 옅은 분홍의 겉옷도 나들이할 때 즐겨 입으시던 고급이었다. 약속 장소는 차로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노모가 차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겨드랑이를 껴안자 옅은 분 냄새가 났다. “어무이, 오늘 아주 이쁜데요.” 차안에서 나는 슬쩍 돌아보았다. “아, 손자사우들과 징손자들이 온다잖아.” 노모가 쑥스러운듯이 얼른 대답했다.

 

뒤늦게 식당에 도착한 딸들이 어머니의 양손을 붙잡고 여전히 정정하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손주들은 함께 배꼽인사를 했는데 마른 대추처럼 주름진 외증조할며니의 얼굴이 낯선지 선뜻 눈을 맞추지 않았다. 노모는 새파란 만 원짜리 지폐를 손주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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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를 처음 본 손주들은 연신 탄성을 질렀다. 다행히 아직까지 결실이 신통찮아 내버려둔 포도송이가 띄엄띄엄 달려 있었다. 동생부부는 지하수로 깨끗이 씻은 포도를 농막에 모인 무두에게 대접했다. 손주들의 채근에 끌려 모두들 포도송이를 찾아 구석구석으로 나가고 농막 그늘에는 장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은 어머니와 나만 남았다. ‘피곤하신 것일까.’ 아마도 아침 일찍부터 목욕하시고 몸단장하시느라 그럴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세히 보니 땀이 밴 볼에 제대로 발리지 않은 분가루가 보였다. ‘연세도 높으신데, 어쩐 일로 저렇게 화장을 하신 걸까.’

 

포도송이를 손에 든 딸과 손주들이 왁자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내가 언제 저들을 다시 볼 수 있겠나.” 장의자에 누운 채 어머니가 물끄러미나를 보며 한마디를 던지고는 고개를 돌렸다.  당혹스런 내 눈에 빗질을 곱게 한 어머니의 뒷머리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결국 어머니는 마지막 만남이 될 지도 모를 손녀, 손주들에게 당신을 좋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야.’ 나는 늙은 여인의 속내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짐짓 큰 소리로 답을 했다. “어무이, 무슨 그런 말씀을. 내년에 포도가 익을 때 다시 올게요.” 어머니의 뒷모습은 별 반응이 없었다. 혹시 당신 화장의 의미를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후손들에 대해 서운해 하시는 것인가. 

 

백명철

출처 <수필과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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