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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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나리

0 개 1,610 김지향

매주 토요일이면 남편은 한 결 같이 꽃들을 사온다. 꽃 할아버지 농장에서 재배 되는 꽃들이라 늘 알뿌리 꽃들이지만, 그런 와중에도 할아버지의 접붙이는 솜씨 덕분에 여러 가지 색과 더불어 조금씩 다른 느낌의 꽃 들을 보게 된다. 

 

몇 년 전에 할아버지의 초대로 농장에 갔었는데, 놀라움을 금할 길 없었다. 그곳에서 재배를 한 꽃들이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해외로 수출이 된다고 했다. 

 

알뿌리를 네덜란드에서 수입해 와서 냉장창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심는데, 창고 하나가 작은 집 한 채 크기이며, 그런 창고가 여러 개가 되었다. 꽃을 키우는 그린하우스도 많은데다 꽃밭도 들판을 이뤘다. 꽃밭의 꽃들은 기계를 사용해서 심고, 그 중 1/10 정도만 골라서 사용한단다. 나머지 꽃들은 다 갈아엎고 그 땅에 새 꽃들을 심는다고 설명하셨다.

 

한 그린하우스에 갔었을 때, 그곳에서의 풍경은 참 인상적이었다. 한 눈에도 정신지체장애인들처럼 보이는데, 그들의 움직임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행복한 미소를 가득 안은 채 한 송이 한 송이 꺾어서 손에 쥐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필름을 돌리는 듯했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환히 웃었지만, 곧바로 꽃과 사랑을 나누는 숭고하고도 경이로운 작업에 몰두했다. 이렇듯 그들에게 일자리를 준 할아버지와 뉴질랜드 정부가 얼마나 위대해 보였던지, 그때의 감동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선명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다.

 

남편이 사온 이번의 꽃들은 정말 재미있었다. 노란 나리들이 한 결 같이 고개를 숙인 데다 연약해보이기까지 했다. 빨간색 글라디올러스, 보라색 글라디올러스, 고개 숙인 나리까지 합쳐서 모두 석 단의 꽃들을 사왔는데, $10을 받더란다. 나리 값을 $2로 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귀엽고 매력적인 나리였다.

 

땅을 보고 있는 나리를 어떻게 하면 돋보이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늘씬함을 자랑하는 보라색 글라디올러스의 키를 낮추고 고개 숙인 나리의 줄기를 자르지 않고 세워서 꽂기로 했다. 그렇게 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하니 조화롭기 그지없었다.

 

노란색과 보라색은 보색의 관계로 서로 함께 하면 무척 화려한 조합을 이룬다. 얼굴이 큰 나리가 노란 우산을 연상하게 해주어 따스한 이미지를 주며, 키를 낮춘 보라색 글라디올러스와 눈을 마주치니 정다운 모습이 저절로 우러난다.

 

마침 아리따운 여자 손님이 현관에 들어섰고, 이 꽃들을 보자마자 예쁘다고 환호를 했다. 과대 표현이었을지 모르나 그녀의 눈에 예쁘게 보였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정다운 꽃들의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을지라도 따스한 에너지가 그녀의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다. 

 

보통 늘씬한 글라디올러스와 얼굴이 큰 나리와 함께 꽃꽂이를 할 땐, 나리는 키를 낮추고 글라디올러스는 키를 살려서 서로 조화를 맞춘다. 그래야 안정감이 있는 꽃꽂이가 되기 때문이다.

 

시중에서 파는 글라디올러스와 나리는 얼굴이 모두 다 하늘을 향하거나 앞이나 옆을 바라보고 있기에 자신의 고운 자태를 충분히 뽐내면서도 서로 조화롭고 화려하게 함께 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멋진 꽃바구니의 주인공들이 되며, 파티 때 테이블 장식용으로도 훌륭한 자태를 뽐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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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늘씬한 글라디올러스 곁에 고개를 푹 숙인 나리가 작은 키로 서 있거나 글라디올러스와 같은 키로 서 있다고 생각해 보자. 아예 한 종류의 꽃을 꽃병에 푹 눌러 꽃은 만도 못한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만약 내가 가서 꽃을 골랐다면 선뜻 고개 숙인 나리를 사지는 못했을 거다. 아니 사지 않고 글라디올러스 석 단을 사왔을 거다. 하지만 남편이 나를 위해 사온 꽃을 나무랄 수는 없는 법이다. 그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서 어떻게든 남편이 기분 좋도록 해주어야 했다.

 

남편의 선택은 탁월했다. 덕분에 나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 아닌가? 남편이 이상한 꽃들을 사올 때마다 내 꽃꽂이 실력은 향상이 되어 갔으니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꽃꽂이 수업을 할 때, 꽃을 고르는 게 가장 중요하여 초보자들에게는 내가 직접 꽃을 사서 꽃들과의 조화부터 가르쳤었다. 그러다가 수준이 좀 높아지면 스스로 꽃을 사오게 하고, 실수도 하면서 제대로 된 꽃 고르는 법을 터득하여 꽃꽂이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왔었다.

 

고수는 그 어떤 꽃으로도 꽃꽂이를 잘할 수밖에. 내가 수술한 이후로 남편이 나를 위해 꽃을 사오고, 그 꽃들로 꽃꽂이를 하는 것은 고수가 되어가는 수련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수련이든 끝이 없는 법. 꽃꽂이라고 다르겠는가? 

 

꽃꽂이를 통해 자연의 법칙에 숙연한 마음이 늘어가고 있기에, 나는 그것만으로도 감사가 절로 나온다.

 

할아버지의 비닐하우스에서 행복하게 일하는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오늘따라 더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그들에게선 고개를 숙인 마음이 전혀 안 보인다. 당당하고 즐겁고 행복한 마음만이 보인다. 

 

그린하우스에 그들의 일터를 제공해 준 할아버지야말로 그들에게 노란 우산 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그 반대로 그들이 노란 나리의 존재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께서 정신지체장애인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 그들을 고용하지 않았다면 그들과의 눈 맞춤도 없었을 것이며, 그들만의 특별함을 즐기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행복이 할아버지의 행복이었으며 그곳을 방문했었던 우리 모녀들에게까지 그 행복이 고스란히 전염되고야 말았다.

 

고개 숙인 나리 덕분에 할아버지 행복의 한 조각이 떠올랐으며, 한 뼘 정도 더 커진 내 행복 또한 재어보게 되었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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