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층 아저씨와 이층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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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층 아저씨와 이층 아줌마

0 개 2,025 수필기행

적막이 찾아든 어둠 속에서 호루라기를 분다. 그 소리에 일층에서 ‘휘리리’ 답이 온다. 일층에는 남편이 살고 이층에는 내가 산다. 만약의 경우,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로의 연락 수단으로 침대 머리맡에 호루라기를 두고 이렇게 가끔 연습도 한다. 요즘 우리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얼마 전까지는 시어머니가 안방에 계셨고, 아들도 방 하나를 차지하여 집이 붐볐다. 시어머니께서 먼 길 떠나고, 아들도 장가들어 분가하니 넓은 집이 적막강산이 되었다.

원래 우리 부부는 이층에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일층 어머님 방에 내려가면서 일층 아저씨가 되었고 나는 이층 아줌마가 되었다. 밤에 담배 생각이 나서 컴컴한 계단을 더듬어 오르내리기가 번거로웠던 모양이다. 점차 옷과 일상용품도 나누어져 일이 층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처음에는 허전하고 어색하던 것이 점차 불편한 점 없이 익숙해져 오히려 편해졌다.

우리 둘은 다른 점이 많아 그동안 서로 맞추려고 노력하며 생활하였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잠자는 시간이었다. 한 사람은 저녁뉴스도 못 보고 꾸벅꾸벅 방아를 찧었고, 다른 쪽은 텔레비전에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에도 다른 채널까지 돌려보다가 자는 올빼미였다.

지금처럼 층별로 살다 보니 잠자는 시간의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다. 텔레비전 시청도 채널 다툼 없이 한 사람은 골프와 뉴스요, 다른 쪽은 눈물을 흘려가며 드라마 속에 파고 들어가 즐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커지는 코 고는 소리에 서로 수면 방해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편안하게 옷을 걸치거나 말거나 이리저리 맘대로 뒹굴 수 있으니 이런 자유가 더는 없다.

이와 같은 생활은 신혼 시절에 숨소리, 눈빛, 얼굴색 하나 하나에 신경 쓰며, 상대 기분을 점치며 같이 웃고 화내며 살 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늦게 들어와도, 길가는 여자를 쳐다봐도, 침대에서 돌아누워도 잔소리 포문을 열었다.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 하는 폭풍 같은 시기는 다 지나가고 먼 길 돌아와 누리는 평온한 심정이랄까

이제 남편이 늦은 시간에 귀가해서 “지금 들어 왔어요.” 하는 소리만 들리면 마음이 놓이고 걸리는 것이 없어졌다. 늦은 이유도 굳이 물을 까닭이 없어졌다. 상대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일까, 기대가 없어서일까, 확실한 마음의 색깔을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같이 살면서 서로에 대해 믿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지나친 기대와 욕심을 접고 너그럽게 서로의 생활을 이해해주며 그저 살아 있음에 고마워할 따름이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어 보고 밤사이 별일 없이 같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음에 행복해한다.

공간적으로 떨어져 살다 보니 서로에 대한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남편도 그럴까. 원래 매사에 이런저런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에 대해서 가타부타 이야기가 없다. 그저 묵묵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 사이가 하숙생과 주인집 아줌마의 관계는 분명 아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알려주고 자랑하고 싶다. 위급상황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고, 부르면 무조건 달려가고 달려오는 남이 아닌 가장 가까운 관계임이 틀림없다.

세월의 강은 우리의 삶을 황혼이라는 무대로 옮겨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심심한 생활로 만들어 놓았다. 하루하루 생활이 변화의 파도로 가슴 쿵덕거리는 흥분도, 마음 설레는 기다림도 없지만, 그저 잔잔한 파도가 남실거리는 부둣가를 맴돌게 하는 편안함이 있다. 

남편과는 글자의 순서를 바꿔도 뜻이 변하지 않는특별하고도 질긴 부부란 인연으로 맺어 가족이란 덩어리를 만들었다. 40년이라는 시간을 즐거움과 서운함으로 긴 역사를 만들었다. 든든한 아들이 둘이나 있고, 숨소리까지 들리는 고요한 적막을 시끌벅적한 웃음을 만드는 재롱동이 손자와 손녀들까지 있으니 이만하면 괜찮은 작품이 아닌가.

요란한 일층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서 급하게 뛰어 내려가니 남편은 등이 몹시 가렵다며 미안한 듯 찡그리면서 웃고 있었다. 늑대소년이 되었어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안도의 숨을 쉬며 나 역시 빙긋 웃음이 나왔다. 비록 옛날 같은 열정은 없어도 간지러운 등을 서로 긁어 주면서 지나온 일을 같이 추억하며 평온한 황혼을 보내고 싶다.

내가 부는 호루라기 소리에 헐레벌떡 올라올 일층 아저씨의 모습을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 이 미란

[출처: 수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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