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과 검정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송하연
새움터
동진
이동온
멜리사 리
조병철
정윤성
김지향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파랑과 검정

0 개 2,592 박지원

인식이 색깔을 바꾼다.

 

아주 어렸을 때, 내게는 스물네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던 크레파스가 있었다. 그 중 몇 개의 색깔을 닳도록 사용하고는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파란색이었다. 내 작은 기억들에 의존하자면, 나는 바다 혹은 강을 그렸던 적이 많았다. 바다는 보통 바다 속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 스케치북의 반 이상이 파란색으로 도배되곤 했다. 

 

그렇게 크레파스 끝이 맨들맨들 해지도록 하얀 스케치북 위를 칠하던 시절을 지나, 파란색은 어느 순간부터 공포를 상징하는 색으로 인식되어갔다. 귀신이나 혼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TV 속에서 공포감을 표현할 때마다 파란 조명을 쓰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보통 눈동자가 없고, 왼쪽 화면 구석에 진한 명조체로 “재연”이라 적혀있었던 많은 프로그램들 전부, 파란색을 조명으로 썼었다. 파란색은 무엇인가 섬뜩함, 싸한 느낌을 만들 수 있구나, 를 어린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 후의 파란색은 조금씩 흐려져 갔다. 어느 책에선가 파란색이 불가능을 상징하는 색이라는 것을 듣고는 불가능이 주는 신비감에 관해 잠깐 생각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외국 락 음악에서 등장하는 “Blue”가 우울함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모든 색들이 그렇지만, 파란색은 내 인식의 저변이 가장 많이 이동했던 색일 것이다. 마치 파란 바다 속을 유영하는 고래처럼. 시간과 시간이 만나 시간이 지나는 시간들 틈틈에 어딘가의 빛처럼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느낌이, 나에게 있어 지금의 파란색이 된 것이다.

 

검정색은 조금 다른 경우다. 다시 유년기로 돌아가자면,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검정색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없었다. 큰 고래를 온통 새까맣게 칠하기도 했고, 당시 보던 NBA 의 광경을 그릴 때는 사람들을 전부 까맣게 그렸다. (실제로 어린 내 눈에 그들은 모두 그저 까맣게 보였을 것이다) 

열일곱 열여덟. 고딕펑크 패션에 빠졌던 이후로는 온통 시꺼멓게 입고 다녔다. 심지어 담배도 까만색 담배를 피웠을 정도로 허세 넘쳤던 그 때는, 검은색은 쿨함의 상징이었다. 검은색은 나를 드러내는 색이자 가장 드러내지 않는 색이었고, 마치 요란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같지만 그저 그림자일 뿐인, 그 때 내 심정을 가장 확실하게 표현하는 색이었다. 

 

그 후, 존경하는 영화감독 김기덕이 했던 이 말이 내 검은색의 세계관을 바꾼다. 

 

“흰색과 검은 색은 같은 색이다. 모든 것은 서로 바라봄으로써 존재한다. 흰 색이라는 말이 없으면 검은 색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낮과 밤, 흑과 백, 플러스와 마이너스… 이 모든 것은 ‘존재하는 서로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흰색과 검은 색은 같은 색이다.”  

 

물론 흰색과 검은색 또한 그 색을 말할 것이 아닌 은유적 표현을 위한 도구이겠지만, 근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존재하는 서로의 에너지라니. 김기덕 감독의 이 말은 내 세계관 중 하나의 줄기로 자리잡았고, 결국 인식 자체가 색깔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수능 때 공부했던 소설 <소나기>의 보라색이 소녀의 죽음을 암시한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인식 자체가 색깔이며, 그 색깔은 스스로가 정의내릴 수 있고 보는 사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색깔이 인식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색깔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수많은 환경들을 지나치며 마침내는 파란색이, 내게는 피상적이 아닌 본질적 심상의 컬러로서 자리한 것처럼. 모든 색깔들이 그렇게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내게는 검은색이(어쩌면 김기덕 감독이) 가르쳐준 것이다. 

 

쓸데없는 거 정의내리기 좋아하는 꼰대 철학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색깔”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는 것을 조금 더 어린 시절에 했으면 더 좋았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색깔에 대한 강박 혹은 편견 없이, 여러가지 색깔로 내 위를 덧칠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시간을 걸어나오면 -이 강박으로 인해- 이 길까지 걸어오며 낭비하고 버렸던 색깔들이 지금의 내게는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결국 흑과 백은 같은 색인 것을.  

 

뉴질랜드에서 행복 찾기

댓글 0 | 조회 564 | 19시간전
우리는 보다 행복한 삶을 향해서 한 … 더보기

호흡으로 명이 길어질 수 있어

댓글 0 | 조회 279 | 19시간전
호흡의 길이와 명(命)의 길이는 관계… 더보기

이 한 그릇의 마음으로 쉬어가기를

댓글 0 | 조회 194 | 19시간전
세종 전통문화체험관에서 듣는동화 스님… 더보기

2024 예산의 새로운 세율 기준

댓글 0 | 조회 1,122 | 1일전
뉴질랜드 정부는 2024 예산을 발표… 더보기

리커넥트 “Care to Self-care?”

댓글 0 | 조회 273 | 1일전
지난 한 달 동안, 리커넥트는 Hen… 더보기

비 오는 날 이성계 능 앞에서

댓글 0 | 조회 184 | 1일전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비 오는 날동구… 더보기

8. 설탕과 술이 지닌 위대한 마력들

댓글 0 | 조회 353 | 2일전
원래 사람은 씨 맺는 모든 채소(허브… 더보기

‘큰 북한’으로 변해가는 러시아

댓글 0 | 조회 338 | 2일전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페이스북은 북… 더보기

낙타와 낙타풀

댓글 0 | 조회 78 | 2일전
시인: 송 재학세상의 모든 낙타들은 … 더보기

AEWV 소지자가 알아야 할 6가지 구구절절

댓글 0 | 조회 632 | 2일전
뉴질랜드에서 합법적인 취업을 할 수 … 더보기

Incredible Years Program

댓글 0 | 조회 205 | 2일전
결혼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대학교… 더보기

순간의 선택이

댓글 0 | 조회 210 | 2일전
싸이(PSY)의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 더보기

오미크론 변종 FLiRT

댓글 0 | 조회 1,948 | 5일전
신종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 더보기

'2025 한국대학 입시 분석 및 대응 전략'

댓글 0 | 조회 513 | 6일전
드디어 한국대학들이 각 대학별로 20… 더보기

7. 오토파지 디톡스가 이런 일까지도 한다

댓글 0 | 조회 431 | 10일전
오토파지와 디톡스는 살아 있는 세포로… 더보기

남북, ‘동족’은 아니라 해도 적이 될 필요야…

댓글 0 | 조회 825 | 2024.05.29
▲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 더보기

가정용 온수 시스템 비교

댓글 0 | 조회 835 | 2024.05.29
안녕하세요, 넥서스 플러밍의 김도형입… 더보기

유학후 이민과정 활용 가이드

댓글 0 | 조회 756 | 2024.05.29
뉴질랜드 영주권 비자를 취득하기 위한… 더보기

포기를 포기하라

댓글 0 | 조회 276 | 2024.05.29
5월이 끝나갑니다.벌써 2024년의 … 더보기

이만큼의 은혜

댓글 0 | 조회 203 | 2024.05.29
■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여기까지 와… 더보기

청춘

댓글 0 | 조회 128 | 2024.05.28
시인 사뮤엘 울만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더보기

창 밖은 아파트

댓글 0 | 조회 600 | 2024.05.28
지금도 변함없지만 이 집에 처음 입주… 더보기

숲의 성장 소설을 읽다

댓글 0 | 조회 177 | 2024.05.28
인제 백담사 숲 명상숲으로 난 길을 … 더보기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고 잔병치레가 잦나요?(2)

댓글 0 | 조회 209 | 2024.05.28
한방에서 말하는 간장과 심장은 간과 … 더보기

임시직 피고용인

댓글 0 | 조회 459 | 2024.05.28
고용계약에는 정규직 외에도 여러 가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