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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것들

0 개 2,405 박지원
이사

뉴질랜드에 와서 네번째 이사를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예 웰링턴이 아닌 다른 먼 지역으로 가는 일이었고, 생각보다 재미있고 힘에 부친 일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렌트라는 것을 해보았고, 인터넷과 전기 등도 계약해보았다. 

실은 급한 이사였다. 직장에서의 좋지 않은 일로 인해- 아, 이것은 부당한 일이다, 하는 생각에 웰링턴을 거의 도망치듯 떠났다. 

인생에서 도망을 참 많이 친 것 같다. 나는 내가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고 생각되거나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도망을 쳐 버린다. 아니, 도망이 아닐 것이라고 내 마음을 스스로 다잡아본다. 돌이켜보면, 내 이사의 목적지는 언제나 한 가지였다. “행복.” 즉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나를 이끌어가는 여행같은 삶. 그것이 내가 뉴질랜드에서 이사를 했던 이유들이었고- 이번 이사는 감정의 진폭도, 물리적인 진폭도 컸었기에 비교적 힘들었던 것뿐이었다.

어디 사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자문하는 것. 이사는 그저 그것에 대한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행복한가. 그래서 행복해질 것인가. 다시 물어본다.


비가 오든 햇빛이 내리쬐든 풀을 뜯어먹는 양을 보면, 양이 되고 싶다. 수많은 갈래길이 아닌 커다란 초원에서, 그저 내 발 아래 모든 것들이 삶의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풀을 뜯다가 잠깐 쉴 타이밍이 와도, 그들은 언제나 그들 존재의 이유 위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한없이 작아지고 투명해지는 느낌으로, 그들은 나를 보고 있다. 

개가 집에 가자 재촉하면 저녁해가 붉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집으로 향한다.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려는 목적을 향해 하얗게 전진해나간다. 그들처럼, 삶의 모든 공간이 목적으로 차있으면 좋겠다. 이것이 비록 나의 시선일지라도, 그들의 시선 한 줌만이라도 닮고 싶다. 

역할극

한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이 그렇듯, 자신의 인생이 사회에서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이 평범한 사람이 한 역할극에 캐스팅되었다. 

다만 문제점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배역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전형적인 미스캐스팅이었다. 눈빛과 말투 등을 허세로 무장하여 가장된 자신감을 어필하려 했지만, 너무도 어색한 나머지 관객들의 표정에선 그저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부자연스러운 말투와 표정,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 역할과 본래 캐릭터 사이의 간극을 적절하게 조합하지 못한, 자기모순에 빠진 평범한 사람이 연기에 몰입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마치 지금은 없어진 프로그램 <119 구조대> 에 나오는 70대 어르신의 괴상한 인터뷰같았다. 그렇다면 70대 어르신이 그러한 인터뷰를 매일 한다고 생각해보자. 웃기는 것도 웃기는 것일 테지만, 그 70대 어르신은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러나 70대 어르신처럼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 이들은 부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애쓰며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단면을 고민하기 보다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초 단위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는 결국 번 아웃과 우울증 증세를 유발하며, 끝내는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부자연스러움에 지쳐서 자신의 인생을 끝장낼 것이다.
 
삶이란 분명 역할극의 부분도 있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가 관건이다. 만약-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역할극을 해야할 상황에 놓여있다면, 자연스럽다고 믿을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계속해서 의심을 해야 한다. 역할극과 자연스러움의 간극이 좁혀졌을 때- 행복의 초점 또한 조금씩 선명해질 것이다.  

남겨진 것들

목적을 뜯어먹으며 사는 양보다도 못한 삶이란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정신적 이사를 끊임없이 갈구하지 못하는 삶이란 얼마나 외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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