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조연, 메를로(Merlot)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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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조연, 메를로(Merlot)의 생존법

0 개 2,759 피터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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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우리사회는 실패(失敗)가 인정되지 않고 그 아픔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더 이상 가르치지 않게 되었다. 최선을 다했어도 실패했다면 비아냥거리고 엿이나 달걀을 맞으며 조롱거리가 된다. 과연 성공한 삶이 꼭 1등만을 뜻하는 것일까? 당신이 발전되어 가는 삶, 과거보다 나아지는 인생을 살았다면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박난 영화나 드라마에는 주인공의 그림자로 살지만 큰 존재감을 나타나는 조연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음식에 감칠 맛을 내는 조미료처럼 극중에 녹아서 눈에 잘 띄진 않지만 개성 넘치는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결국 관객의 주목을 받는다. 사실 그들이 없는 영화나 드라마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오히려 갑자기 인기스타가 되고 덕분에 극중에서 주연을 거머쥔 이들의 어설픈 연기보다 조연들이 보여주는 은근하고 깊은 내면연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빡빡하게 꽉 끼어서 뒤꿈치가 아픈 새 구두보다는 뒤축이 좀 닳은 헌 구두가 허물없고 애정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레드와인의 품종 중에서 훌륭한 조연(助演)의 역할을 해온 와인이 메를로다. 사실 레드와인 하면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라고 할 정도로 레드와인의 주인공은 카베르네다. 이 포도는 작은 사이즈, 어두운 색, 두꺼운 껍질, 많은 씨앗이 특징이다. 와인으로서의 외형은 무척 거친 셈이다. 카베르네가 질감이 무거운데 비해서 메를로는 순하며 부드럽고 타닌성분이 덜한 편이다. 메를로(Merlot)의 본고장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 지역으로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적 포도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그 양은 카베르네 소비뇽의 두 배나 된다. 뉴질랜드에는 조금 늦은 1980년대 초에 심어지기 시작했으나 점차 그 생산량이 증가하는 추세다. (카베르네 소비뇽-310헥타르, 메를로-1224헥타르, 2013년 WINE NZ통계). 

메를로는 기후의 영향도 덜 받는 편이고 카베르네보다 3주나 먼저 익으며 와인의 숙성도 빠르다. 더군다나 작은 사이즈의 카베르네보다 몸집도 우람하고 탐스럽다. 그러니 와인 제조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베르네에 비해서 복합미와 개성이 부족하고 힘과 농축미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뉴질랜드에서는 기후 차가 크지 않은 오클랜드 근교나 노스랜드, 그리고 주로 혹스베이(Hawke’s Bay)가 주요 생산지다.

메를로는 이러한 태생적인 이유로 단일 품종으로 나서기보다는 타닌이 강한 카베르네에 유연성을 가미해 부드러운 맛을 첨가하는 블랜딩(혼합, Blending)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단단하고 마른 골격의 카베르네를 풍부한 몸집으로 만드는 역할을 해 온 셈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높아진 소비자들의 수준에 호응하기 위해서 메를로의 역할이 중요해졌고 주연과 더불어 앙상블을 이루는 완성도에 대한 요구 또한 높아지고 있다. 우수한 와인들 속에서 더욱 냉정해진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선 작은 배역 하나까지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메를로가 주연이 될 수 있는 개성은 충분하다. 우선 색상이 진해서 알코올이 높다. 보통 같은 조건에서 자란 카베르네보다 1-2도 정도가 높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중후한 미감(Medium Bodied)을 선보이며 알맞은 산도를 지니고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에 비해 복잡한 면은 덜하지만 과일 맛이 더 풍부해서 블랙베리, 체리, 자두, 초콜릿, 모카, 때로는 가죽 향도 나며 오크통에서 숙성하게 되면 기존의 진한 과일 향에 버터나 크림 향이 가미되어 난다. 메를로 포도가 완전히 익었을 때 건조한 기후를 기다려 수확해 발효과정에서 골격과 힘을 주고 오크배양을 통해 복합 미를 키워줌으로써 ‘특급칭찬’을 받을 수 있는 명품으로 탄생시킨다면 충분히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는 와인이다.

극중에선 조연이 주연보다 튀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고 한다. 주인공이 최대한 빛날 수 있도록 오직 살신성인만이 용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스타도 누구나 처음엔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외우며 밤을 지샌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느 무명배우의 처녀작품 속 한 장면처럼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겨울의 끝을 비집고 물오르는 봄의 새싹을 바라보며 다투어 꼭 돈 많은 부자의 성공은 아니어도 유유자적 자연을 닮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한번의 실패가 절대 끝은 아니다. 그곳으로부터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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