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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작데이(ANZAC DAY) 유감

0 개 2,888 정경란

<뉴질랜드 병사 6.25 참전비, 가평>


얼마전 일간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이곳 키위들은 와이탕이데이(Waitangi Day)보다 앤작데이(ANZAC DAY, 4월 25일)를 더 중요한 기념일로 생각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앤작데이를 더 중요한 국가적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영국계 키위들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대영제국의 도미니언(Dominion, 여왕이 임명한 식민지 총독이 관할하는 자치지역)으로서 호주와 뉴질랜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대영제국의 요청으로 많은 병사들을 지중해 전투에 보냈고, 터키의 갈리폴리전투에서 많은 병사를 잃었다. 한마디로 대영제국의 총알받이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할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섰으니 절반은 새로운 조국 뉴질랜드를 위해 싸웠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외에도 호주와 뉴질랜드 병사들은 대영제국을 위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내전에도 참가하고 한국의 6.25에도 참전한다. 
 
세월은 흘러 뉴질랜드는 이민국가가 되었다. 그들이 적국으로 참전했던 터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끊이지 않고 새로운 이주자들이 유입된다. 나는 한국전을 경험한 부모님을 둔 세대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뉴질랜드 병사들의 희생에 감사한다. 게다가 필자의 오라비가 사는 가평에는 6.25 당시 가평전투에서 희생당한 키위병사들을 위한 기념비가 서 있기도 하다. 그래서 존 키 수상이 세계정상회담을 위해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빠지지 않고 들른 곳 역시 가평이었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자국의 영토에서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다. 할아버지의 나라 대영제국의 부름을 받고 제국의 이익을 위해 싸운 적이 더 많았다. 물론 한국전의 경우는 다르다. 

그러므로 앤작데이의 의미도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대영제국의 부름을 받고 총알받이로 나아간 젊은 키위 병사들은 물론, 그들이 참전했던 전쟁에서 죽어간 적국의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전쟁이 부른 모든 죽음을 추도하는 날로 바뀌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앤잭데이는 오로지 영국계 키위들만의 고립된 기념일이 될 것이다. 터키계의 이주민 자녀가 커서 뉴질랜드 해군에 지원할 수도 있다. 그들에게 앤잭데이가 조부의 나라 터키를 침공한 대영제국 병사들만을 추모하는 기념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면 이후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미래 세대에게 어떤 국가적 정체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멀지 않은 미래에 아시안계 수상이 뉴질랜드를 대표할 수도 있다. 

동성결혼 합법화가 보여주듯 뉴질랜드는 지구상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 진보적인 나라다. 전쟁을 혐오하며 여성의 권익을 (지나치리만치^^) 옹호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행동으로 옮긴다. 앤작데이를 ‘평화’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정립해가는 일은 다른 거대 이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민족적인 소소한 것들을 품어가면서도 ‘평화’ 라는 가치를 최고의 자리에 자리매김시킬 때 이곳이야말로 내 뼈를 묻을 수 있는 곳이라는 자부심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핏줄을 넘어서, 약속된 사회 시스템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한 ‘국가’를 구성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뉴질랜드가 좋아서 의지적으로 뉴질랜드 시민이 되길 선택한 사람들 중에는, 과거 키위 병사와 총부리를 겨눈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를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온갖 인종적, 문화적 배경 탓에 확고한 국가적 정체성이 다소 미약하긴 하지만 나는 내 나라만큼(가끔은 더) 뉴질랜드를 좋아한다. 신참 이주자가 보기에 분명 ‘뉴질랜드스러운’ 것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내 아이들 역시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뉴질랜드스러운’ 것을 배우고 이 사회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직업적으로 공헌하며 살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앤잭데이가 영국계 키위들만 빨간 종이꽃을 가슴에 꽂고 다니는 날이 아니라, 전쟁은 결국 모두에게 비극이고 그 어리석은 광기에 희생당한 모든 이들을 추모하는 날로서 정립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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