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금속활자본과 박병선 박사-제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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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금속활자본과 박병선 박사-제 1편

0 개 2,575 정경란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영어 공부를 위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주한미군방송인 AFKN을 시청하던 중이었다. 프로그램 이름은 ‘Jeopardy’로 퀴즈쇼였다. 더러는 알아듣기도 하고, 더러는 무슨 말인지 모른 채 보고 있었다. 그 중 귀가 번쩍 뜨이는 문제가 있었으니 이랬다. ‘구텐베르크보다 00년 더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였다. 정답이 아주 ‘분명’해 보였기에 누구라도 쉽게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아니, 세상에. 아무도 감히 정답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쇼에 참가한 미국인들은 그동안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냈다고 믿고들 있었던 터라, 그보다 더 먼저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가 따로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세계 최초 금속 활자본의 나라로 인정받은 한국 시청자의 소견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결국 사회자가 아시아의 국가라는 식의 힌트를 주었음에도 엉뚱한 ‘못먹어도 고~’ 식의 시도를 끝으로 그 문제를 맞추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사회자가 ‘코리아’라고 정답을 알려주었지만, ‘아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의 감탄사는 전혀 없었다. 참가자나 방청석에서도...전혀...

‘아니, 저걸 왜 모를까?’

아시아의 끄트머리에, 누구 말마따나 맹장처럼 붙어있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그때까지 공인된 기록상)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했다는 사실을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선뜻 받아들일수 있는 서구인이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한국이라니...

청주에 가면 고인쇄 박물관이 있다. 올 겨울 박물관 기행의 일환으로 꼭 들러야 할 곳으로 꼽던 곳이었다. 버섯 머리를 한 박물관 지붕이 인상적이었는데 실제 버섯의 형상에서 따온 것인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이 박물관은 전적으로 세계최초금속활자본이라는 ‘직지’(정식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인데, 확 줄여서 그냥 직지라고 한다.)와 실제 금속 활자로 인쇄되었음을 5년여의 노력으로 밝혀, 유네스코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한 박병선 박사 덕분에 생겨난 박물관이다. ‘직지’는 말 그대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부처의 가르침의 본질을 ‘대놓고 간단하게 말하겠다’는 것인데 저마다 마음을 바르게 가지면 그게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가면 이 ‘직지’ 원본이 없다. 복사본만 있을 뿐이다.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다. 우리한테 빼앗아 갔더라면 다시 돌려달라고 떼를 쓸 수 있으련만 안따깝게도 구한말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플랑시가 어느 고물상 혹은 누군가에게 돈 주고 사 간 것이라고 한다.



박병선 박사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나 역사학, 민속학, 철학을 두루 공부하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가 된다. 당시까지 직지는 프랑스 서지학자에 의해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음이 책 뒷면에 밝혀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실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음을 증명한 예는 없었다. 플랑시 공사의 손에서 이후 다른 이의 손으로 넘어간 직지는 최종 소유자의 유지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된다. 그리고 서고 한켠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이 책을 찾아낸 박병선 박사는 도서관장에게 그 책의 가치를 역설한 뒤 도서관장의 특별허락으로 5년 동안 홀로 서지학과 인쇄술사를 공부하면서 온갖 재료로 (심지어 당근과 진흙으로도) 주형을 뜨고 실험까지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유네스코에 발표하였고 직지는 2001년 공식적으로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몇 줄로 간략하게 요약하였지만, 실제 박병선 박사가 개인적으로 겪은 어려움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직지를 연구하던 5년 동안 한국 학계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당신이 서지학자도 아닌데 왜 그걸 연구하느냐’라는 식의 말도 안되는 핀잔도 듣고, 박병선 박사의 연구에 숟가락만 얹어서 마치 자기네들이 그 공을 세운 듯 위세한 교수도 있었다.

아주 우연찮게, 2000년도 초반 대학원시절, 구내식당에서 이 분과 마주하고 점심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소박한 옷차림에 ‘노구’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로도 연세가 많이 들어뵈던 박병선 박사는 대화중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속으로 ‘저분을 더 붙들고 인터뷰라도 해야 하는데...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을텐데....’ 하면서 기회를 보았지만, 게으름이 병이라 끝내 시도도 못해 보았다.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임을 알았고 실제 아주 많이 나를 탓하고 또 탓했다. 박병선 박사의 헌신과 노력은 ‘직지’에서 멈추지 않는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그것도 오락성 프로그램에서) 시작하여 크게 사회적 호응을 불러온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름도 낯선 외규장각 도서라... 알고 보면 아주 놀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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