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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0 개 1,690 정경란

어려서부터 외국은 미국이었지 싶다. 외국인은 미국인, 즉 금발의 백인종만을 가리키는 배타적 어휘였다. 미국은 이민 국가이며 그러므로 온갖 인종의 나라라는 것을 사회 교과서에서 배운 후에도, 배움 이전의 원초적 체험의 이미지는 여전히 강고했다. 그리하여 흑인, 혹은 아시안계가 ‘아임 어메리칸’ 이라고 소개하면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이물감이 떨치기 어려웠다. 

미국 이외의 ‘외국’이란 월드컵이나 올림픽 게임에서 맞붙는 상대팀, 혹은 심심하면 독도 소유권을 주장하며 한국인에게 절대적 타자임을 새삼 자극시키는 ‘일본’ 정도랄까. 그러다 지난 10년 사이에, 조그만 소도시에서도 하나 둘씩 눈에 띄기 시작한 동남 아시아 혹은 방글라데시 출신의 까무잡잡한 낯선 이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였지 ‘외국인’으로 분류될 수 없었다.

그만큼 내 시선 역시 내가 사는 땅의 역사성과 선입견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어찌됐든 한국에서 나는 甲이었다. 외국이 미국 이외의 ‘외국’으로 내 의식속에 진지하게 되새김질의 대상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뉴질랜드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어. 물론 잘 들리지 않았다. 왜 이따위로 영어를 하는지. 멀쩡하고 우아한 BBC 같은 영어 놔두고 왜 그리 촌스럽게 발음하는지 불만이었다. 그래서 성인강좌를 갔다. 왜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곳은 당연히 영어가 외국어인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러 오는 곳이었다. 선생님만 빼고. 캄보디아, 중국, 스페인, 칠레, 아르헨티나, 독일, 베트남. 그리고 한국. 그 강좌를 3학기 내내 들으니 키위들의 액센트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전 세계인의 영어에 귀가 트였다. 사실 동아시아라고 해도 캄보디아가 다르고 태국 사람이 다르다. 그게 느껴지기 시작한 거다. 인지되기 시작하니 고유한 존재로 인식된다.

뉴질랜드에 올 때는 적어도 마오리족에 대한 사전이해는 있었다. 다만 내 인식에 더 도드라진 것은 혹은 내가 관심 가졌던 부분은 뉴질랜드가 영국식민지였으며 호주와 달리 인종적 차별이 덜하고 (거의 없고-개인적으로, 심정적으로 느끼는 것 말고) 개개인의 권리를 그 어느 나라보다도 법적으로 보장하는 나라라는 거였다.

누구나 인정하듯 뉴질랜드인들은 친절하다. 아주 친절하다. 길거리에서 눈 마주치면 인사하는 그들. 맨 처음에는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신기하던지. 더 신기한 것은 아시안계 키위도 서스름없이 인사한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부지런히 인사하고 인사 받는다. 그게 그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나아가 문화다. 아이들이 그걸 배운다.

뉴질랜드에서 그나마 규모가 큰 텔레콤이나 유통회사들이 미국식 마케팅 기법을 추종하는 것 같아서 안따깝지만, 이것이 전 사회를 휩쓸만큼 파괴력이 크지 않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법적 시스템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 선진국은 달리 선진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예의를 법률적으로 강제하는 시스템이 선진국이다. 이런 부분은 내가 이 나라에서 아직은‘외국인’으로서 느끼는 부러움이다.

한국도 점점 이민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한국태생이 아닌 우리 속의 외국인을 부르는 이름에서조차 아직도 그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우리’의 틀에서 밀어내는 배타성을 본다. 뉴질랜드에서 ‘이주 결혼’ 내지 ‘이주 노동자’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서양인과 한국인이 결혼하면 국제결혼이고, 우리보다 못사는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면 ‘이주 결혼’이고, 그 가정은 ‘다문화가정’이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시스템과 사회적 분위기를 조율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내가 뉴질랜드 사회에서 느끼는 것만큼 한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이민자들 역시 한국 사회가 그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준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빨리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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