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핑크빛 골프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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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핑크빛 골프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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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내 옷장서랍 한 견에는 작은 비닐백에 들은 임자 잃은 골프장갑이 얌전히 자리잡고 있었다.“나는 언제 주인님 손에 끼워져 바깥세상 구경을 하나요?”서랍을 열 때마다 늘 그렇게 바라보는 것같아 의식적으로 외면을 하면서 긴 세월이 마냥 흘러가 버렸다.

수 년전 어느날인가 예쁜 종이에 곱게 포장 된 작은 소포꾸러미가 한국으로부터 날아왔다.
“골프 치실 때 꼭 제 생각하면서 끼세요.”
가리 엄마의 예쁜 마음을 담은 편지 한 통과 핑크바탕에 흰색콤비의 가죽장갑이 들어 있었다.

스포츠 센터를 처음 오픈하면서 제일 먼저 나를 생각해 주었다니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다.
뉴질랜드가 골프의 천국이라고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터라 내게로 당연한 것으로 알았을 가리엄마, 그러나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고급 스포츠라는 한국적 옛날 인식이 뿌리깊이 박힌 나는 언감생심 꿈도 꾸어 보지 못했다. 누군가 골프를 권할 때마다 이 나이에 나같은 사람이? 개가 웃는다고 일축해 왔는데 그 장갑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호기심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허지만 그 때뿐. 운동신경이 둔해서 배드민턴 배우던 시절의 스트레스도 떠오르고 새로운 것의 도전이 귀찮고 겁이 나서 그 장갑을 오랫동안 주인을 찾지 못했었다. 당당하게 고맙다는 답신조차 띄우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내 나이가 버겁다고 갑자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것 염두에 두지 않고 살다가 갑자기 나이를 의식하는 것도 이상했다. 식욕도 없고 먹어도 소화가 안되어 병원가고 약도 먹었지만 차도가 있기는커녕 형편없는 꼴로 되어갔다. 모든 게 귀찮고 싫어서 만나자는 친구들도 사양하고 깊은 병든 환자가 되어갔다.

의욕을 잃으니 막연한 절망감으로 죽음을 생각하며 불안 속에서 자신을 추스리기에 역부족이었다. 한 달 두 달…,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리에 누워있다가 문득 내가 왜 이 모양일까? 무엇 하나 도려 내야 할만큼 아픈 환자도 아니라는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곰곰히 생각했다. 한국에서 언니가 다녀가신 후 부터라는 걸 깨달으니 작년에 D형님이 정신과 치료까지 받으셨던 우울증에 내가 걸린걸 짐작이 되었다. 나도 별수없는 속물이었음에 놀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그동안 배드민턴 같이 치고 등산 함께하던 친구도 골프장에 빼앗겼음에 놀랬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차를 몰고 골프장을 찾아 나섰다. 친구들이 가 있을 그 곳을…….

한바탕 부지런한 골퍼들이 떠나간 오후여서일까? 너무 조용했다. 무한히 펼쳐진 푸른 들판을 멋지게 공을 날리는 친구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걸으며 가슴이 뻥 뚫리는 것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이미 반쯤은 병을 고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 내가 서랍 속의 골프장갑을 끼게 된 동기는 그렇게 다급하고 맹랑하게 시작이 되었다.

찬란한 아침해를 맞으며 필드에 서는 순간, 나만을 위하여 비워진 무한한 초원에 마음이 넉넉해진다. 무아의 경지에서 온갖 신경을 작은 공에 집중할 때 세상에서 더럽혀진 먼지를 훌훌히 털어 버리고 고뇌도 번뇌도 없다. 마치 기도를 바칠 때처럼 경건해진다.

가슴이 시린 허허로운 가을인생, 이 계절이 그렇게도 쓸쓸했는데 요즈음은 빨갛게 노랗게 익어가는 단풍이 매력적으로 손짓해 부르는 것만 같아 그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새 핑크빛 고운 장갑이 제 본래의 모습을 잃고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이제야말로 가리엄마가 준 숙제를 끝내는 기분이다. 오늘 저녁에는 그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골프장 이야기를 써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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