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속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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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속 女子

4 3,544 김영나
#1. 한국의 전통 장(醬)들은 오래 묵으면 약이 된다. 위장병엔 묵은 간장이, 외상이나 화상에는 된장이, 감기나 어혈 푸는 데는 고추장이 특효라고 한다. 어느 종가집에는 3백년 내려오는 씨간장이 있다. 장독을 열면 검은 필름 같은 간장 위에 하늘과 구름과 여인의 상(像)이 맺힌다. 그 장면을 TV에서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3백년이라니---
 
#2. 왜 뉴질랜드로 이민 오셨어요? 교육 문제 때문에, 한국 정치에 신물나서, 조용히 살고 싶어서--- 표면적인 이유는 입을 맞춘 듯 비슷하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고향을 떠난 이유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서러운 일을 당해서였다. 

<청춘을 바쳐 일하던 직장에서 무 잘리 듯 단칼에 잘렸어요.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했죠. 한국 교육 풍토에서 애들을 키울 자신이 없었어요. 장애아가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찾아 왔죠. 돌싱이 된 후로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죠. 새 사랑을 만났어요.>

달콤한 인생이었다면 떠날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시고 떨떠름해서, 뭔가 명치 끝에 돌덩이가 매달린 듯 더부룩해서 떠났던 것이다. 반면, 아무런 문제도 상처도 없었지만 뉴질랜드의 자연과 느린 삶을 좋아해서 이민 온 이들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불치병 중 하나라는 이민병에 걸려 결국 뉴질랜드로 왔다. 한국을 떠나올 무렵,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만 믿지 마!” 

뉴질랜드는 전 세계 교민 사회 중 가장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얘기도 여러 차례 들었다. 

“같은 민족끼리 믿지 못하면 누굴 믿나, 객지에서. 게다가 지적 수준도 높다는데---설마?”   

오클랜드에 12년 살면서 내가 ‘설마?’의심했던 일들이 속속 벌어졌다. 이민 사회의 특성상 소규모 비지니스 창업이 많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온 가족이 매달려 일하는 생계형 업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바로 옆에 똑같은 업종의 가게를 당당히 열고 옆 가게를 망하게 만들고야 말겠다고 작심하고 달려드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이민 새내기들을 등쳐서 바가지를 씌우거나 돈을 떼어먹고 도망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노예계약으로 종업원을 부리는 업주들, 제 눈에 들보는 안보이고 남의 눈에 티끌을 트집잡으며 송사를 일삼는 자들---
 
게다가 교민 사회에서 방귀 꽤나 뀐다는 이들이 맑은 시냇물에 먹물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일을 자행한다. 물이 더러워지면 정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할 사람들이 더 나서서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이민 2세들이 무얼 배울까? 

한국에 갔을 때, 급한 일이 있어 짧은 거리를 택시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중년의 택시 기사님은 흥분하셔서 한국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다. 

“영어, 수학 조금 더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는 인성 교육만 시키면 됩니다. 사람 만든 후에 영어 수학 가르쳐도 늦지 않아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 체면, 양심, 타인에 대한 배려, 질서 등등의 덕목을 모르는 인간이 지적 수준이 높다한들 인간 사회에 도움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도(道)와 의(義)가 없는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집단에 무슨 고귀함과 행복과 감동, 희망이 있겠는가.

로버트 풀검의 말대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는데---’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마라. 남의 맘을 상하게 했을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라. 차조심 하고 손을 꼭 잡고 의지하라. 밥 먹기 전에는 손을 꼭 씻어라. 균형잡힌 생활을 하라-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라. 네가 어지럽힌 것은 네가 꼭 치워라 등등.” 

#3. 장이 익어가는 장독대 풍경이 그립다. 할머니가 반질반질 닦아놓은 항아리 위로 햇살이 댕강댕강 부딪치고, 감나무의 황금빛 감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장이 잘 익나 궁금해 하고. 나는 큰 항아리를 속에 들어 앉아서 만화책을 읽곤 했다. 항아리 안은 아늑하고 나는 행복했다. 좋은 장처럼 나도 좋은 사람으로 익어가는 기분이랄까. 요즘, 그 속에 들어앉고 싶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격정의 시간을 견디고, 절망과 눈물에서 희망을 방울방울 걸러내고, 불순한 의도를 사랑으로 발효시키면서, 오래 묵은 장처럼 그렇게. 철 들지 않은 사람들 모두 오시요, 빈 항아리로. 
 
은하수별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만 살아도 행복이 넘칠텐데. 그 이상 배우고 살아가려 하니 삶이 슬퍼지고 불행해지나 봐요/ 나도 기회가 되면 우리 아들 큰 항아리 준비해줘야겠네요.
ygna7
오랜만이시네요, 은하수별님!
옛날에는 큰 항아리들이 참 많았는데요, 전 기회가 되면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장독대가 갖고 싶어요.
은하수별
네, 꼭 그러세요. 제가 아주 작은 항아리 단지 하나를 책상 연필통으로 사용했는데 오클랜드에서 이사 온 한 분이 들고 갔어요, 새우젖 담고 싶다고.. 이곳에서도 항아리 보면서 살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꼭 간직하시길..
ygna7
은하수별님 감사합니다.
옹기, 항아리 ---그런 것들 생각하면 마음이 푸근해져요. 할머니 생각도 나고요.
할머니 치마꼬리 붙들고 다니면서 된장 고추장 간장 맛보던 어린 시절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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