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거 그리고 점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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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다거 그리고 점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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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리산 자락 화개(花開)에 머무른 것은 잘한 일이었다. 화개 버스 정류소에 가면 구례, 하동, 부산, 남해, 서울 가는 버스들이 시간 맞춰 들어온다. 나는 구례 장날 섬진강변을 따라 달리는 버스를 타고 구례에 가서 장 구경을 실컷 했다. 구례장은 여수에서 올라온 생선과 해산물이 풍성했고 지리산이 키워 낸 귀한 약초들이 장바닥에 즐비했다. 유근피(느릅나무 껍질), 겨우살이, 우슬, 상황버섯---아직 마르지도 않고 작두로 싹둑 잘리지도 않은 물기 머금은 약초들의 영험한 기운이 혹 엄마의 관절염이나 내 몸의 잡병을 낫게 해주지나 않을까 한동안 들여다 본다.

배가 출출해지면 시장통에 있는 팥죽집에서 팥죽을 사 먹었다. 새알심을 넣은 것과 칼국수를 넣은 것 어느 것을 먹을까 망설였더니 팥죽집 할머니가 두 가지를 섞어 주었다. 간단한 문제를 한참 고민했다. 팥죽을 먹는데 귀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얇은 판자로 칸막이를 한 옆 주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남자들이 떠들어댔다. 싸우는 게 아니라 그냥 오랫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 한 잔 걸치고 얘기하는 것인데 기차 화통이 옆으로 지나가는 것 같다. 하긴 몸집도 작고 먹는 것도 새모이 만큼 먹는 연이 언니도 목소리는 우렁차게, 이렇게 말한다.

"야이 문딩이 자슥아! 올매만에 전화 하노? 니 한번 죽어볼래?"

하동 장에 갈 때는 일부러 돌아 돌아 가는 완행 버스를 탔는데, 매실 마을을 지나갈 때 나는 매화꽃이 핀 봄날을 또 떠올렸다. 언젠가는 벚꽃과 매화를 보러 이른 봄 날부터 지리산 자락을 찾으리라, 생각만해도 가슴이 뛴다. 하동 장은 구례장보다 활기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구례장이 좋았지만 하동 시장의 팥죽은 쌀을 갈아 넣어 깐죽한 맛이 좋았다.

장에 갔다 오는 버스는 할매들로 만원이다. 들고 지고 이고 버스에 올라탄 검붉은 피부의 우리네 어머니들. 할아버지들은 다 어디가고 할매들만 삶의 현장에서 치열한 것일까?

장돌뱅이처럼 장날을 챙기며 떠돌다가 나른한 몸으로 화개에 돌아와서 쌍계제다 시음장 앞을 지나는데 또(볼 때마다 그러므로) 들어와서 차 마시고 가라고 정숙 언니가 부른다. 정숙 언니는 우전, 작설차는 물론, 매화차, 국화차도 능숙한 다도법으로 만들어 따라 준다. 그 손놀림이 아름답다.

차마다 향긋함과 풍미가 다르다. 나는 오래도록 따뜻한 난로가에서 차를 음미한다. 어느덧 입 안에 감도는 향미도 사라질 즈음 나도 사라지고, 오래된 도자기와 다기(茶器)들의 은근한 빛깔, 물 끓이는 소리만 느껴진다. 선(禪)의 경지를 맛보았다고나 할까?

중국의 조주선사는 끽다거(喫茶去;차를 한 잔 하게나)라는 게송으로 유명했다. 그는 손님을 맞이하면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도 '끽다거'였다. '이 뭐꼬' 화두와 더불어 나는 '끽다거' 화두도 맘에 들어서 써먹기로 했다.

"집을 내놨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 안하네"

"끽다거!"

"바람 피우다 돌아온 남편을 어떡하냐?"

"끽다거!"

"이민성에서 또 보충서류 해 오라는데, 명 짧은 사람 영주권 받기 전에 죽겠다"

"끽다거!"

서산대사의 할아버지인 지엄선사의 화두는 점다래(點茶來;차를 따르라)였다. 선사는 차를 마시며 설법을 전파하기를 즐겼다. 선사는 "너희들은 밖을 향해 구하지 말고 마음 깨치기에 힘써라"라는 말을 마치자 '점다래!'하고 입적했다.

화개는 산이거나 밭이거나 차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랑을 만들어 곱게 다듬어 놓은 재배 차도 있고 야산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야생 차나무도 널려 있다. 그래서 나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 동안 매일 차를 마셨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삶은 하루하루의 습관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지리산에서 차를 마시면서 새해에는 아주 좋은 습관과 화두를 얻은 기쁨에 행복하고 든든했다.

끽다거!!! 점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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