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餘白) -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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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餘白) -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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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저물어 가는데 천길 만길 낭떠러지가 가로놓여 있어서 건너편에 펼쳐진 선경(仙境)을 눈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선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어 내일 날이 밝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선경에 가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잠을 청하였습니다.

이름 모를 새의 고운 노래 소리에 문득 잠을 깨고 보니 벌써 아득히 먼 동쪽 산등성이 위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황급히 일어나 건너편 선경을 바라보니 아득하게 펼쳐진 산봉우리마다 우뚝우뚝 솟은 기암괴석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고 수많은 골짜기에는 하얀 솜처럼 서린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면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폭포수마다 영롱한 무지개가 보석목걸이처럼 걸려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간단히 요기를 하고 낭떠러지를 조심조심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미끄러지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낭떠러지를 내려왔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기암괴석이 있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눈길 닿는 곳마다 기화요초가 형형색색으로 꽃을 피워 저마다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고 이름 모를 새들의 고운 노래 소리가 햇살처럼 숲을 뚫고 들려옵니다.

발걸음 닿는 곳마다 각양각색으로 전개되는 비경(秘境)에 취하여 힘든 줄도 모르고 산 꼭대기에 오르자 사방으로 아득히 펼쳐지는 대 자연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잃을 지경입니다. 저토록 아름다운 선경을 담을 종이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는데 홀연히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미 그려진 것을 지우면 되지 않느냐” 깜짝 놀라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옳은 말이다 싶어 종이를 꺼내어 지우려고 하는데 네 개의 풍경이 나름대로 다 아름다워 어느 것을 지울까 망설이고 있는데 다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느 것이고 다 마찬가지다. 네 마음에 담아놓았기 때문에 아까워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시 “네 마음에 담아놓은 풍경들을 다 지워 없애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들은 대로 했더니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본 풍경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면서 그것에 대한 애착이 다 없어졌습니다. “풍경을 마음에 담고 있던 너마저 없애라” 하는 말과 함께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대로 했더니 신기하게도 ‘나’라는 의식이 없어지면서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고서 사방을 둘러보니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다거나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고 하는 시비 분별하는 마음이 없이 그냥 있는 대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 올라왔습니다. 하늘에 뜬 구름도, 발길에 차이는 돌도, 쪼르르 내달리며 알밤 줍는 다람쥐도, 자갈밭에서 모진 목숨 이어가는 풀 한 포기도, 새 소리 물 소리도 다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모자람도 넘침도, 잘남도 못남도, 애타게 갈망하는 목마름도 바램도, 부러움도 없습니다.

이제는 사는 삶도 위해서 살아야 할 ‘나’가 없어 그냥 사는데 그 삶이 모두를 위한 삶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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