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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영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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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척박한 계절이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고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먹어야 한다. 먹고 마시고 버텨서 새로 오는
봄을 기다리는 게 겨울을 지내는 존재의 숙명이다. 이 척박한
계절에 우리가 기댈 고마운 식재료가 뿌리채소다. 뿌리는 생명의
근원이다. 사찰에서 엄동설한을 살아내는 힘이기도 하다.
낯선 땅에서 이어진 인연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2018 년 가을. 간간이 전화로 서로 목소리는 들었지만 꽤나 오래 이어진 감염병 시국도 그렇고, 서로의 삶이 그리는 궤적이 좀처럼 교집합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렇게나마 인연이 이어진다는 것. 그건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일이다. 정효 스님과의 재회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 사이 스님은 문경 윤필암에서 장수 영월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주지의 소임을 받았다. 장수는 처음 밟아보는 땅이었다.
그 인근의 무주, 진안, 남원, 하물며 함양도 여러번 다녀왔지만 여기만큼은 기회가 없었다. 한국의 오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무진장’. 무주, 진안, 장수 세 지역을 묶어 통칭하는 말이다. 강원도 깊은 산골 못지않게 이 세 지역은 한반도에서 오지로 분류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나마 무주나 진안은 여행지로 꽤 거론되고 있지만, 장수는 그렇지 못했다. 그만큼 알려진 것도 적고, 가 본 사람도 별반 없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월암으로 향하는 길에 설레는 마음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던 건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장수의 첫인상은 평화로웠다. 어릴 적 보았던 시골의 풍경 그대로였다. 마치 밥 짓는 시간이 되면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수한 밥 냄새가 들판을 가득 메울 것만 같은 그런. 장수군의 시내에서도 한참은 떨어진 마을의 복판을 지나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올라가 영월암을 만났다. 전각 하나, 요사채 하나, 공양간 겸 다실로 쓰는 건물 하나. 암자다운 단출함. 저리도 평화로운 마을 곁산자락 위에 올라앉은 작은 절이 정겨웠다.

정효 스님은 마침 전주와 익산을 오가며 일을 보던 중이라고 했다. 땅거미가 질 때 절에 올라 어둑해진 풍광에 익숙해질 때쯤, 스님은 돌아왔다. 등장부터 특유의 존재감이 대단하다. 까르르, 까르르. 몇 년 만에 보는데도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그렇게 반겨주었다. 노곤해지던 참이었는데 정신이 확 깨어난다. 반가운 인연이라는 건 이런 느낌이라는 듯. 만나지 못했던 시간의 장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그렇게 낯선 땅에서 다시 인연이 이어진다. 작은 절을 홀로 지키는 스님은 늘 그랬듯 씩씩했다. 그래서 좋았다. 기억하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변함없어서. 다실 한쪽의 방을 빌려 잠을 청할 때도 편안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푸근함이 몸을 따스하게 토닥여주는 것만 같았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지혜가 생기고 복덕을 짓는 공양간의 일
계절이 차가워질 때면 안개를 만난다. 물가가 있는 고장이면 해가 뜰 때쯤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영월암에서 내다보이는 앞마을에는 큰 물길이 없음에도 잔잔한 물안개가 올라 산과 산 사이로 흘렀다.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있다 내려왔더니 이내 밥짓기가 시작된다.

“뭐 해 주실 거예요?”
“겨울에는 육근탕이 좋지 않겠어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그거니까요.”
스님은 손이 빠르다. 혼자서 슥슥, 서걱서걱. 그럼에도 여섯 가지나 되는 뿌리채소가 차례차례 음식으로 변모할 준비를 마친다. 육근탕은 여섯 가지 뿌리채소가 들어가는 음식이다. 우엉, 연근, 당근, 감자, 토란, 무. 모두 가을에 가장 맛이 오르는 식재료다. 수확해 놓고 저장해서 먹기에도 좋다. 정효 스님은 해인사 보현암에서 출가자의 길을 익혔다. 육근탕은 겨울마다 대를 이어 손에서 손으로 전해주던 보현암의 음식이다. 수도 없이 만들어 대중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렸고, 보현암을 떠난 후에도 겨울이면 어김없이 만들었던. 손에 익을 만큼 익어 눈을 감고도 만들 만한 정효 스님의 시그너처. 세상에 육근탕을 알린 것도 정효 스님이고 지금도 육근탕을 말하면 으레 정효 스님부터 떠올리는 이가 많다. 그 음식을 다시 만난다.
곁에서 뭐라도 도울까 얼쩡거렸지만, 식재료 다 듬는 일은 도무지 스님을 따라갈 재간이 없다.
“공양간 소임을 오래 살다 보면 배우는 게 많아요. 요즘은 행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예전처럼 공양간 소임을 사는 일이 드물지만, 예전에는 필수였거든요. 새벽부터 찬물에 손 담그고 재료를 다듬는 게 힘들어도 그걸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거든요. 그때 선배스님께 많이 들었던 얘기가 있어요. 채공을 살면 지혜가 생기고 공양주를 살면 복덕을 짓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곁에 서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준비하는 건 즐겁다. 새겨들을 만한 게 많다. 주거니 받거니, 손으로는 씻어둔 식재료를 건네고 입으로는 서로의 생각과 공감을 주고받는다. 음식을 만든다는 건 먹을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기는 일이다.

때로는 온 마음을 다해 조리하는 과정에만 집중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이처럼 함께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정을 전하는 상황도 있는 법. 어떤 경우든 최고의 음식은 마음이라는 조미료를 더할 때 완성된다.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은 좀처럼 실망을 안긴 적이 없다. 그건 음식의 완성도를 맛으로만 평가할 수 없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육근탕 하나만 해도 손이 많이 가고 적잖이 시간이 걸리는데 스님은 밤조림에 다시마부각까지 준비를 시작했다. 마침 공주에 사는 도반스님이 햇밤을 보내줬다며 겉껍질과 속껍질을 깠다. 햇밤은 그냥 먹거나 잘 말려서 은은한 단맛을 끌어올린 건율로 먹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했는데, 이렇게도 한번 맛을 보라신다. 여기에 처음 보는 방식의 다시마부각까지. 다시마에 밥알을 두세 알 올려서 며칠 말린 뒤 튀기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스님의 설명이다. 늘 이럴 때는 꼭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금방 해요.” 안다. ‘금방’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걸리겠지만 정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웃었다. 스님도 웃었다. 그 사이에 아침 해는 밝게 떠올랐고 어느새 마을위로 흐르던 물안개는 사라져 있었다.
맛의 도화지, 채수는 꼭 필요한가
간장을 넣고 밤을 조려낸 후 스님은 공양간 바깥의 가마솥에 손질한 뿌리채소를 넣고 참기름을 뿌린 뒤 볶기 시작했다. 가스 불에 볶아도 될 테지만 육근탕은 역시 예전 방식 그대로 만들어야 제 맛이 든다. 나무를 때고 센불에 오래 볶아 채소가 가진 고유의 맛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정효 스님은 모든 채소를 한입 크기로 균일하게 잘랐다. 처음 식재료를 다듬을 때만 해도 생김새는 각양각색이었다. 자르고 나서야 알게 된 게 있다. 예쁘게 생긴 것과 못생긴 것의 차이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생명은 보기에 잘나고 못난 것에 가치가 있지 않아서다. 겉보기에 예쁘게 생긴 것이 더 맛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본질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우엉이든 연근이든 정성을 다해서 다듬은 데에는 그런 뜻이 있었다. 잘 다듬고 잘라내면 생김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솥에 넣어 볶아낼수록 뿌리채소는 종류에 따라 하얀 진액을 내기도 하고 단맛이 올라오기도 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단단한 것과 무른 것을 구분해서 순서에 맞춰 조리해야 한다는 점. 단단한 것을 먼저 넣어 오래 볶고 적당한 시간이 되었을 때 무른 것을 넣는다. 그렇게 씹히는 치감을 균일하게 맞춘다. 여기에 채수를 넣는다. 그리곤 끊임없이 휘휘 저어준다. 젓는 동안 타들어 가는 나무가 내뱉는 연기에 눈이 따갑지만 기꺼이 견뎌내며 팔을 놀릴 뿐.

뿌리채소가 익어간다. 가마솥 안의 국물도 하얗게 변해간다. 스님에게 채수를 넣는 이유를 물었다.
“왜 맹물이 아닌 채수를 쓰나요?”
“저는 채수가 맛의 도화지라고 생각해요. 그 위에 식재료가 가지고 있는 맛의 색을 덧입히는 거죠.”
여기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채수는 맛을 더하는 장치다. 수행자는 맛을 탐하는 행위를 경계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채수를 쓴다는 건 어쩌면 수행자의 음식과는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수행자가 가져야 할 식생활의 자세를 이야기한다.
배고프면 나무 열매를 먹어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목이 마르면 흐르는 물을 마셔 그 갈증을 식힌다.
이는 극한의 고행에 가까운 태도다. 앞뒤의 내용을 보면 함부로 따라 하기 어려운 수준의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물며 먹는 것의 문제는 배고픔을 면하고 갈증을 달랠 정도로만 취하라며 생활의 기준을 말한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맛을 더한다는 측면에서 수행자의 음식에 채수를 사용하는 게 맞는 일일까. 이 질문에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채수를 쓰면 안 된다는 것도 맞는 이야기예요. 그렇지만 대중의 음식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맛을 유지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사실 맛을 내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의돼 있는 게없어요. 그러니 만드는 사람의 마음도 있을 것이고, 먹는 사람의 태도도 중요하겠죠. 맛을 탐하지 않는 건 먹는 이의 마음자세에 달린 문제일 테니까요. 만드는 사람이기에 저는 채수를 쓰고 있을따름이에요.”
뿌리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식사
정효 스님은 이와 관련한 고민도 이야기했다. 사찰음식을 만들면서 맛간장을 사용하는 문제다. 조미료가 다양해지면서 간장 역시 매우 세분화되어서 제품이 나오고 있는데, 맛간장은 맛을 더하는 데 굉장히 탁월한 효과를 낸다. 채수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사찰음식을 만드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지 고민스럽다고 했다. 이 모든 건 사찰음식에서 맛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맛을 내는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잘 담근 간장과 참기름 외에는 다른 조미료를 더하지 않았음에도 육근탕은 감칠맛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건 뿌리채소에서 배어 나오는 맛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채수다. 그러니 사실 맹물만 부어서 끓여도 육근탕은 맛이 좋다. 마지막으로 들깻 가루를 풀어서 음식을 끝낸다. 이는 각 재료가 품은 맛을 하나로 묶어주는 단계다. 각각의 뿌리채소가 가진 맛과 식감은 각각의 점을 형성하고 들깻가루는 이 점을 선으로 이어서 비로소 조화를 이루도록 한다.

그릇에 담아 맛을 봤다. 담백하다. 국물은 고소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을 보내며 맛은 뿌리로 모여들어 응축된다. 이를 겨울에 먹거리로 삼는 것은 먹을 게 없던 시절 이만큼 영양소가 풍부한 게 없기도 하거니와 가장 맛이 드는 계절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찾아온 이를 향한 스님의 마음이 더해졌다. 이것만한 조미료가 또 있을까.
무의 단맛과 당근의 단맛은 이 한 그릇에 모여 있으면서도 확연하게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잘 익은 감자와 연근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밀도 높은 식감으로 음식의 빈자리를 메운다. 그 뒤를 토란이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다. 밀물처럼 맛의 파도가 차례로 입속에 밀려 들어와 부서졌다. 이윽고 썰물처럼 사라질 때쯤 쌉싸름한 우엉이 마무리를 해 주었다. 마지막 이 하나가 없었다면 육근탕의 맛은 훨씬 가벼웠을 테다. 여기에 반찬으로 만든 밤조림은 간장의 짠맛과 단맛이 자칫 가 벼울 수 있었던 밤의 촐싹이는 식감을 지긋하게 눌러줬다. 역시 육근탕에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스님의 다시마부각은 별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았음에도 씹는 순간 입안에서 폭발하듯 감칠맛이 터졌다. 분명 익숙한 맛이지만 낯설게 다가왔다.
전분이나 쌀가루가 더해진 게 아닌 밥알이 올라가서 완성한 다시마의 맛은 색달랐다.
스님이 내어주신 식사를 하는 내내 맛을 음미하며 감동에 젖었다. 타인을 위한 마음이 담긴 음식은 각별하다는 걸 다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생각에 젖어 들었다. 겨울에 먹는 뿌리채소는 존재 자체로 알려주는 깨달음이 있었다. 뿌리가 가진 맛은 단순히 맛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모든 것이 쇠하는 계절, 생명의 근원이 되는 뿌리는 모든 것을 내어주며 다른 생명을 살린다. 감사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 마음을 다해 합장을 했다. 겨울은 뿌리로 돌아가 그 존재가 전하는 설법에 귀를 기울이는 계절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