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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0 개 84 이경자

“아! 오월이군요.”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앤여왕이 부정의 누명을 쓰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하늘을 우러러보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 억울한 누명에 대한 통한의 한마디일 수도 있지만 정말 감탄할 만큼 하늘이 고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소녀같은 감성으로 되돌아가 덧칠해본다.


달이 바뀌면 사람마다 달력속의 같은 숫자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삶을 계획하고 경영한다. 같은 오월을 살면서 누군 웃기도 하고 누군 울기도 하면서 어떤 이는 어느 날을 기다리고 다른 이는 그 날이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도 한다. 세상의 끝인 것 같이 힘들고 서럽던 순간들도 지나고 나면 때론 그립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해변 모랫벌에 찍혔던 무수한 뭇새들의 발자국처럼 시간이라는 썰물이 쓸어안고 간다. 사람들은 “아! 이제야 오월이네.” 또는 “벌써 오월이야…” 하기도 한다. 그 사람들 중 나는 후자로 “벌써 오월이네” 하면서 달력을 넘긴다. 그것은 하릴없이 빠른 세월을 탓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말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시간만 눅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셀프 질책일 수도 있다.


오월! 수필가 피천득님은 “오월은 금방 찬물에 세수한 그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오월은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 가락지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살결같이 보드랍다.” 라고 쓰고 있다.


나는 계절중 오월을 좋아했었다. 나른한 봄에서 깨어나는 맑고 포근한 달이기 때문이다. 지금 고국은 이른 봄꽃이 지고난 뒤 향기짙은 라일락 꽃이 골목마다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끝도 없이 사래긴 밭의 청보리가 푸르고 싱그러운 그럴때이며, 그 녹음은 또 정열의 여름을 준비하고 있을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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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Google Gemini AI


떠나오기 전 내가 살던 집 옆 저택엔 엄청나게 늙고 큰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제 품의 절반을 담 밖으로 내어주고 있었고, 이맘때 쯤이면 연보라 꽃이 셀수없이 피고, 그 댁에선 크고 밝은 등 여러개를 나무 윗쪽으로 비추게 해 놓았었다. 그래서 온동네가 등롱을 밝힌 듯 환해, 지나가는 이들도 한번쯤은 담 안쪽을 올려다 보기도 하고, 애써 맡으려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향기에 취하곤 했었다.


그 나무는 왠만큼 내리는 비엔 나무 밑 둥근 비 그림자가 보송보송 젖지도 않았다. 가끔 저녁을 먹은 후 아주 편안한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나무 밑 담에 기대서서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면, 어느 추억속에 서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비밀스러운 말을 고백해도 될 것 같은 착각이 슬며시 나를 미소짓게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보라색 꽃모양보다 먼저 취했던 그 냄새다. 


친구들중 연애결혼으로 맨 처음 결혼했던 어린 신부는 호된 시집살이중에 시아버님까지 편찮으셔 오랜동안 병간호에 시달렸는데, 돌아가신 후 그 때의 냄새에서 헤어나오질 못해 힘들어 했었다. 우린 그때 “에이 설마” 했었는데 정말 무형의 그 냄새가 안 잊힌다. 꼭 그 라일락 향기가 좋아서라기보다 어릴 때 안아주면 맡아지던 엄마의 품냄새같이…이 나라에선 라일락이 별로 많지 않은 듯 눈에 띄지 않는다. 목련은 고국에서보다 훨씬 많은 품종으로 자주 보게 되는데…


푸른 하늘과 신록의 달, 앤 여왕이 마지막 올려다 본 그 하늘은 아무래도 내 고국의 오월과 닮지 않았을까 싶다. 민들레, 바이올렛, 진달래, 개나리, 복숭아, 살구꽃이 연달아 피고, 또 지고나면,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었던 라일락의 계절 오월, 하지만 이 곳 뉴질랜드 오월은 겨울장마를 예고하듯 매일 비가 질금대고 여름내 말라있던 뒷뜰 툇마루의 이끼들이 제철 만난 듯 되살아나고 있다.


덜컹대는 무쇠다리미에 숯불담아 풀기 빳빳하게 다림질해 입고, 웃음많고 꿈많던, 그리고 개똥철학으로 밤을 하얗게 밝히던 그 시절, 그때가 일생을 계절로 치면 오월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긴 그때도 나름 희노애락이 동반된 세상이었을 것이긴 하다.


허황되게 젊어서는 세월은 지가 알아서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인줄로만 생각했었는데, 세월은 오히려 나를 앞세워 함께 몰아가고 있다. 바로 등뒤에 따라오는 것 같던 건강도 젊음도, 지나온 시간 저만큼에서 나를 보며 어여가라 손사레질 치는 듯 하다. 돌이켜보면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삶과, 산것보다 훨씬 적게 남은 시간 사이에서 때론 조급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 하는데, 어떻게 사는 게 세월을 아끼는 것인가를 아직 모르고 그냥 열심히 살았는데 아마도 보시기에 미쁜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시도때도 없이 질금대는 뉴질랜드의 겨울비로 파란 이끼끼어 물비린내 풍기는 뒷뜰 툇마루 밑으로 제철을 놓치고 핀 하얀 부추꽃이 다소곳이 고갤 숙이고 있고 잎지기 시작한 플라타너스 가지들 사이로 그렇게 또 비오는 오월을 보고 있다.


시인 T.S. 엘리엇은 “사월은 잔인한 달이며 또 사월은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며 꽃뿌리며 온다” 하던데 사월에 떠난 친구들은 꽃향기에 홀려서 찬란할 고국의 오월이 오기 전에 서둘러 갔는가?


먹먹한 가슴 속에 자꾸만 꺼지려는 작은 등 하나를 켜고 그 등마져 꺼지지 않게 숨을 참는다. 그리고 주문을 외듯 피천득님의 싯구를 소리내어 중얼거린다.


“신록을 바라다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는 세어서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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