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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뉴질랜드 민사소송은 원고 측에서 소장을 법원에 제출하고, 법원에서 승인을 받은 후 피고 측에 송달하고, 피고 측에서도 답변서를 제출하고, 사건 관리 회의 (case management conference)에서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지 결정하고, 그 결정사항에 따라 양측의 모든 증거서류 공개, 조정 참석, 진술서 제출, 변론서 제출, 재판 참석 등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그렇게 재판까지 도달하기까지 빨라도 1-2년은 걸릴 것이며, 늦으면 3-4년 이상이 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사건이 너무너무 확실할 때, 혹은 상대방의 소장 혹은 답변서에 진정성이 없을 때,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소송을 진행하여야 한다면 그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럴 때 신청할 수 있는 절차적 신청 (interlocutory application) 으로는 약식 판결 (summary judgment) 및 각하 (strike out) 신청이 있습니다.
두가지 모두에 해당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근거로는 ‘내 사건이 너무 확실하다’ 혹은 ‘상대방의 클레임 혹은 답변이 가당치도 않다’입니다. 보통 재판이라 함은 모든 서류 증거들 뿐만 아니라 증인 심문을 통해 가능한 한 모든 증거들을 파악하고 심리를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확실한 서류 증거들이 있을 때 그것들이 우선시되고 증인들의 증언은 서류 증거를 뒷받침 하는 정도이거나 서류 증거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증거 서류만으로 사건이 정확히 성립하여 증언이 거의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재판까지 진행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이지요.
그래서 이 약식 판결 혹은 각하 신청의 경우 보통 증인심문 없이 서류 (진술서 및 증거서류) 만으로 심리를 합니다. 판례상의 판단 기준은 ‘서류만 보았을 때에도 확실하게 사건 종결이 가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증거가 요구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계약 위반일 것인데, 계약서가 서류로 작성되었고, 계약 위반을 했다는 (그리고 계약 위반한 쪽에서도 그것을 인정한)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그 위반으로 인한 손해가 계약서에 이미 명시되어 있거나 아니면 너무나도 예측이 가능한 경우입니다. 혹은 약식 판결의 경우 ‘상대방의 잘못 인정’ (liability) 까지만 신청하고, 정확한 손해 배상 금액은 그 다음 단계에서 정해질 수도 있습니다.
혹은 원고의 사건이 법적으로 성립이 불가능 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예시 중의 하나는 소멸시효 (limitation) 을 넘겨서 소송을 시작한 경우입니다. 민사의 기본적인 소멸 시효는 사건 발생으로부터 6년까지인데, 그 기간을 넘겨서 소송을 시작한 경우 피고측에서는 재판까지 수 년을 기다리며 시간과 비용을 낭비해야 할 필요 없이 약식 판결 신청을 통해 사건을 바로 종결시킬 수 있습니다.
각하 신청도 약식 판결과 비슷한 면이 많이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각하 신청이 더 광범위 한 것이고 약식 판결은 좀 더 특정한 경우에만 이루어집니다. 즉, 각하 신청은 약식 판결이 성립할 때에도 할 수 있고 혹은 상대방의 클레임 혹은 반박이 쓸 데 없이 딜레이를 너무 시킬 것이라던지, 하찮고 괴롭히기만을 위한 소송이라던지, 절차 남용인 경우에도 신청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서 변호사 없이 나홀로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소송을 해대는 사람, 혹은 이 곳 저 곳 (예를들어 지방법원에서도 소송을 하고 고용위원회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소송을 하고 등등) 소송을 해대는 경우, 약식 판결에는 해당되지 않으나 절차 남용에 해당되어 각하 신청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시간 제한의 경우도 약간은 다른데, 약식 판결은 보통 소송 초반에 신청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지방 법원에서는 피고의 답변서 제출 날짜로 부터 10 비즈니스일 안에 약식 판결을 신청해야 하고, 고등 법원에서도 똑같은 기한 내에 ‘노티스’를 줘야 하고, 그로부터 15 비즈니스일 안에 실제 약식 판결을 신청해야 합니다. 그 기간을 넘긴다고 해서 신청이 불가해지는 것은 아닌데, 법원의 특별 허락 (leave) 이 필요해서 그에 대해 별도 신청이 추가로 필요하며, 왜 기한 내에 신청을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야 합니다.
각하 신청의 경우 원래는 특별한 시간 제한이 없었습니다. 지방 법원에서는 여전히 시간 제한이 없고, 고등 법원은 새로운 소송법이 2026년에 적용되어, 약식 판결과 똑같은 시간 제한이 생겼습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약식 판결 및 각하는 소송에서 ‘지름길’을 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1-2년 혹은 3-4년 걸리는 소송을 빠르면 6개월정도만에 마무리지을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송에서 이 약식 판결이나 각하 신청을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이걸 신청했다가 패소한 경우, 그만큼 (6개월 정도) 추가로 시간 낭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수도 있는것이고, 또한 변호사비용도 문제가 됩니다. 이걸 신청한 데 들어간 시간 만큼 내 변호사 비용이 증가한 것과 더불어, 패소했기 때문에 상대방 변호사비까지 물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원고가 약식 판결을 신청한 경우, 약식 판결에서 졌다고 해서 반드시 본 재판에서도 진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약식 재판에 대한 변호사비 책정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본재판 끝날 때까지 미뤄지는게 일반적이지만요.
또한 약식 재판을 신청했다가 패소한 경우, 위와 같이 본 재판과 기준이 다른 것일 뿐이기 때문에 본 재판에서도 진다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상대방은 한 번 이겼기 때문에 본재판에서도 이길 것 같다며 우쭐대는 꼴을 봐야 할 것이구요.
그래서 중요한 결정사항은 얼마만큼 내 증거가 확실한지 일 것입니다. 판사와 같은 제3자가 서류만 보고서 ‘이건 누가봐도 이길 수밖에 없네. 재판에 가도 달라질 건 없겠네’ 하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그런 수준의 증거가 부족하다면, 약식 판결이나 각하 신청 없이 일반적인 절차를 따르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또한 교민들간의 소송의 경우 한글로 된 서류들이나 서신들이 많고 번역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도 조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양측간에 번역에 대한 분쟁이 없으면 괜찮을 수도 있는데, 번역에 대한 분쟁까지 있다면 한글을 접해 본 적 없는 판사들은 서류만으로 이걸 판단하기 어렵다고 하여 약식 판결 신청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