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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사업 도전기: 뜻밖의 인연, 오징어 회와 선식업의 시작
가족이 합류하면서 드네딘에도 한국인 가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Knox 신학대학의 장 목사님, 그리고 박 사장님 가족까지 세 가정이 모여 식사도 하고 여행도 다니며 타국 생활의 외로움을 달랬지요.
그러던 어느 날, 드네딘 외항에 한국 목재 상선이 들어왔다는 뉴스를 듣고 장 목사님과 함께 달려갔습니다. 반갑게 맞아준 선장님은 우리를 위해 싱싱한 오징어 회를 내놓으셨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에 살 때 생선 비린내 때문에 회를 거의 먹지 못했습니다. 고작해야 소금 절인 조기나 고등어, 혹은 고향 대전에서 고추장에 비벼 먹던 홍어 회 정도가 전부였지요. 하지만 우리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선장님의 성의를 생각하니 못 먹겠다는 말이 차마 안 나오더군요.
그렇게 눈 딱 감고 한 입 먹어본 오징어 회가 제 인생 ‘회 맛’의 시작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없어서 못 먹는 귀한 음식이 되었지만, 그때 그 시절엔 그런 풋풋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선장님은 제 인생을 바꿀 제안을 하셨습니다. “뉴질랜드에 오는 한국 배들은 많은데, 제대로 된 선식업자가 없어 항상 고생입니다.
남 선생님이 직감적으로 선식업에 소질이 있어 보이는데, 한번 뛰어들어 보시지 않겠소?”라는 권유였습니다. 당시 취업 비자로 와 있던 저에게 ‘언젠가 내 사업을 하겠다’는 꿈의 씨앗이 심겨진 순간이었습니다.
첫 주문의 떨림과 8개월 치 생활비의 기적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웰링턴에 거점을 둔 수산업체의 고기잡이배가 드네딘 내항에 들어온 것입니다.
부식이 급했던 선장님은 저에게 내일 오후 출항 전까지 납품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앞뒤 재지 않고 “감당하겠다”며 첫 주문을 덜컥 받았습니다.
작은 승용차 한 대로 채소, 쌀, 육류를 사러 다니며 온종일 발을 굴렀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 물건을 사고, 업체 차량을 빌려 겨우 배 앞에 도착했을 때의 그 긴장감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무사히 납품을 마치고 손에 쥔 수익금은 약 2,400달러. 당시 저희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300 남짓이었으니, 무려 8개월 치 생활비를 단번에 벌어들인 셈입니다.
이 짜릿한 성공의 경험은 훗날 오클랜드로 이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영주권이라는 날개를 달고 떠난 2박 3일의 대장정
1987년 8월, 드디어 기다리던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85년 드네딘 병원에서 태어나 시민권을 가진 딸아이까지 네 가족이 뉴질랜드에 온전히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 무렵, 동업 관계였던 현지 회사와 한국 측 사장님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현지 메니저가 녹용 구입가를 조작해 이익금을 가로챈 증거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현지 회사는 저에게 공장 메니저 자리를 제안하며 남아달라고 붙잡았지만, 저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 못하여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하였지만, 저는 이틈에 새 사업을 할 이제 제 목표는 오직 하나, 더 큰 세상인 오클랜드였습니다.
봉고차에 짐을 가득 싣고 남섬 드네딘을 떠나 오클랜드로 향하는 길. 픽턴에서 페리를 타고 쿡 해협을 건너 웰링턴에 도착하니 밤이 깊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 집에 장ㅇㅇ목사님이 오셔 나에게 기도를 해 주시는데 이때 처음의 그 기도를 받고 그것이 내 평생의 기억이 되었으니 그 인연은 내 평생의 기억에 남는 기도였습니다.
전국 지도를 펴 놓고 Dunedi – Chrischurch – Picton – Wellington – Parmerston North – Hamilton – Aycjkland 의 여정
아래의 글은 나의 “이야기 My Story”에 있는 “008 새 삶의 Auckland 와 나의 사업 확장 영역”의 글 일부를 인용합니다.
이제 드네딘을 떠난 나의 긴 이사 이야기를 적어야 한다.
내 삶에 1982년 뉴질랜드 온 것이 큰 의미로 첫 번째의 이주가 되었으며, 이제 드네딘 떠나 오클랜드로 향한 역사가 두 번째의 이주가 된다.
그동안 몇 차례 찾아 가 보던 Christchurch의 국도는 낮익어 달리기 좋았다. 날씨마저 화창한 하늘의 맑음이 더욱 기분 높여 주었다.
몇 시간 올라가니 도로 쪽에 노란 개나리 활짝 핀 모습 보여 차를 세웠다.
그 옆 농장에는 완두콩을Your own pick up 판매하느라 몇 사람 콩을 따고 있는 모습으로 우리도 약간의 완두콩을 따 구입하였다. 봉고차에 실린 짐은 가득하여 조금의 틈도 없었고 앞쪽 좌석에 식구들 다 태워 앉게 하였으며, 뒷좌석에 또 처와 원희가 약간 누워 쉴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놓아 편안하게 하였다.
오로지 나의 안전한 운전과 차의 상태 양호한 안전만 믿을 뿐이다. 크라이스트쳐치에서 하루 묵었다. 이제부터는 처음 지나가는 길이 된다.
북쪽으로 계속 올라 마지막 도시 Picton 에 도착하였다.
Dunedin – Christchurch : 361km ( 4 h 46 min )
Christchurch – Picton : 337km ( 4 h 50 min )
Picton – Wellington : via Interislander Cook Strait Ferry 109km ( 4 h 10 min )
Wellington – Levin : 98.6km ( 1 h 26 min )
Levin – Devonport Auckland : 562km ( 6 h 41 min )
오후에 도착한 우리는 Ferry 배 시간에 맞추어 차와 함께 배에 올랐다.
부응 기적 울리며 남섬 북섬의 쿡 해협을 가로질러 저녁쯤 웰링톤에 도착하여 이정남 회장 교민을 만나 인사 후 차를 북으로 몰아 Levin에 닿아서는 이곳 모텔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제 내일이면 장도의 목적지 오클랜드에 입성한다. 그간의 피곤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아침 길을 떠난다.
목적지 닿기까지 긴 장거리의 운전이다.
중간중간 쉴 틈도 만들어 간식과 휴식도 가졌다.
Pukehohe 마을에 닿으니 이제 차량도 점차 많아지고 고개 넘어 지날 때 멀리의 오클랜드인듯 거대한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큰 지역이 되는지 까마득히 멀어도 넓게 펼쳐진 도시다.
이곳은 내가 도전해야 할 목적지가 되는구나.
그 꿈 이루게 될 오클랜드여! 시내에 가까울수록 거대한 차량의 행렬이 나를 설레게 한다.
이 시간은 차차 어둠이 깔리고 나는 미리 숙지한 오클랜드 도로를 기억에서 꺼내 오클랜드 하버 브리지를 넘었다. 이제 큰 도로에서 시내로 연결 된 도로를 찾아야 한다.
Takapuna로 나왔다. 그리고 머리에 저장한 위치를 찾아가는 중 마지막 구간 정도에서 약간 헤맨다. 주유소에 들러 도로명을 물어 보니 근방 가깝게 그 지명이 있음의 설명을 들었다.
집주인을 찾았다. 우리의 사항을 알아 늦은 밤 시간 기다린 주인은 가까운 곳의 빈집을 알려 준다.
키를 받고 방에 들었다. 아! 2박 3일의 긴 여정 끝에 새 삶의 머물 곳을 찾았구나. 간단한 잠자리 이불 등 꺼내 방에 모두 누웠다.
레빈(Levin)의 모텔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장거리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푸케코헤(Pukekohe) 고개를 넘어설 때 멀리 보이던 오클랜드의 거대한 도시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곳이 내가 도전해야 할 목적지구나!”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낮에는 선식업, 밤에는 청소: 쉼 없이 달린 오클랜드의 첫날들
다음 날 데본포트(Devonport)에 짐을 풀자마자, 이른 새벽 저는 바로 항구를 찾았습니다.
마침 유류 쪽 항구에 한국 배가 있었지요. 그곳에 올라 선장께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 보고 선식 주문 받으로 왔냐고 묻습니다. 그 답을 제가 사정으로 알려 줘야하니 오늘이 나의 이곳 첫 날이라 선식은 주문을 받아도 공급 등이 어려워 다음에는 해 드립니다라고 말 했지요.
그때 생각하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내 형편이 아직 오클랜드의 지역 파악도 하지 못해 주문은 언감생심 이제부터 각 거채처 위치들을 수소문 해 놓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 한동안 한국 배 소식은 뜸했고, 비싼 생활비(내 수준으로)에 나의 귀중한 재산은 조금씩 축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체면을 버리고 청소 일을 시작했습니다. “오클랜드에 가서 호강시켜 주겠다”며 아내를 데려왔는데, 밤마다 아이들을 사무실 구석에 내려 두고 아내와 함께 사무실 바닥을 닦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대형 선식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주문량만 US$18,000가 넘는 거대한 규모였지요. 내가 가진 자본금이 부족해 발을 동동 구르는 저를 믿고 선장님이 5,000달러를 선불로 주셨습니다.
우선 채소는 큰 납품처가 있어 그 채소별 주문은 가능하고 그들의 배달 차량으로 근처의 배에 납품배송도 가능했습니다.
다음은 육 고기 주문으로 멀게 자리한 Hellby 업체를 찾았습니다.
주문의 내용을 이런 정도가 되어
등심, 안심, LA갈비, 사태 등으로 보통 한 품목 150kg 되면, 약 600Kg
돼지 고기도 이런 부위별 나누면 약 400Kg
그러면 한 박스 당 10kg로 포장이다,
그리고 생선의 주문
오징어, Snapper, Hoki, Kingfish, Tuna, Salmon, Paua
등으로 이들도 종함하여 300Kg 이상이 됩니다.
이들의 주문도 해 놓고 금액이 부족하면 배에 선적하는 그 자리에서 내가 돈을 받아 주면 되었습니다.
쌀 등 식재료 양념 등 계란, 우유, 꿀,등 이들도 차량 한 대 가득 넘치며,. 이 회사는 모든 금액 구입시 다 지불 오직 배달을 이 회사가 책임입니다.
다음의 이것은 별도의 주문입니다.
면세품 주문의 술. 담배 이것도 금액이 만만치 않은 $6,000이 넘습니다.
위 일을 모두 완벽히 처리하여 다음 날 모두 선적 완료하니 늦은 저녁이 되는데 이 금액도 다 받았고, 슬쩍 선장님, 기관장님, 부식부장님의 사례 봉투는 만들어 살짝 찔러 주고 나왔지요.
이제는 그 수익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며칠 해 주지 못한 청소업 사무실 청소를 해 줘야 하는데. 이때 심정이 어떠했는지 지금은 그 지난날의 회상이 입가의 미소로 변합니다.
당시는 내가 그 고통 등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뛰어야 하는 사무실로 한 밤에 찾아 불 켜 놓고, 청소를 하는 내 모습이 창가에 비추이면 앞에 있는 내 몰골은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으며, 그 시각 꼭두새벽 2시경일터 창밖의 달 빛은 훤희 비추고 나는 이 청소가 끝나야 내 맡은 임무가 책임으로 다 완수되는 것이었습니다.
‘임무 완수’라는 책임감, 그리고 가족과 함께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집에 돌아 와 수익을 계산해보니 처음 가졌던 돈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남았더군요. 잠이 올 리 만무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서야 비로소 단잠에 들 수 있었던, 그 뜨거웠던 오클랜드의 첫날들을 저는 영원히 기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