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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낯선 땅 뉴질랜드(New Zealand)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이 나라의 자연이 내 삶 깊숙이 스며들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당시 환경보호부 Department of Conservation(DOC)가 지정한 ‘9 Great Walks’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트래킹 코스들로 그저 동경의 대상에 불과했다. Abel Tasman Coast Track, Heaphy Track, Kepler Track, Lake Waikaremoana Track, Milford Track, Rakiura Track, Routeburn Track, Tongariro Northern Circuit, Whanganui Journey. 이 이름들은 언젠가 가보고 싶은 길이었지만, 그 길이 내 인생의 궤적이 될 줄은 몰랐다.
이후 2019년 Paparoa Track, 그리고 2024년 Hump Ridge Track이 추가되면서 뉴질랜드의 Great Walks는 모두 11개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을 걷는 여정은, 어느덧 내 인생 첫 번째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나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이민 초기, 토요일이면 오클랜드(Auckland) 외곽 Waitakere Ranges의 Waitakere Dam을 한 바퀴 도는 소박한 산행이었다. 그 인연으로 교민 산행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고, 30여 년 세월 동안 토요 산행은 삶의 일부가 되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고,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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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Great Walk는 2011년 Tongariro National Park의 Tongariro Northern Circuit이었다. Ngauruhoe와 Tongariro 산군이 펼쳐내는 활화산 지형, 에메랄드빛 호수, 증기가 피어오르는 분화구는 살아있는 지구의 심장을 보는 듯한 경이로움이었다. 총 43km의 여정을 산을 좋아하는 친구 몇이 함께 4일 동안 걸으며, 나는 자연의 압도적인 스케일 앞에 겸손해졌다. 그 뒤 북섬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좋은 이곳을 나는 네 차례를 더 다녀왔다. 2016년, 능선을 넘던 순간 갑자기 떠오른 무지개를 카메라에 담았고, 그 사진은 이듬해 세계 7대륙 여행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특히 2018년 한겨울, 눈 덮인 Tongariro 정상에서의 노숙과 촬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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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Fiordland National Park의 Milford Track은 아내와 단둘이 다녀왔 다. 50년전 한국에서 산을 통해 인연을 맺은 우리는, 이곳에서도 나란히 발걸음을 맞췄다. 약 53km의 이 트랙은 울창한 원시림과 수많은 폭포와 빙하가 빚어낸 계곡을 따라 이어지며, 최고 지점인 Mackinnon Pass를 넘는 순간 장대한 피오르드랜드(Fiordland)의 풍광이 펼쳐진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책로(the finest walk in the world)’라는 명성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온몸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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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4월, Te Urewera 지역의 Lake Waikaremoana Track(약 46km)에서는 깊고 고요한 자연 속에서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Panekire Bluff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호수는 마치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고 있었고, 이곳에서 마주한 새벽 빛을 담은 사진 ‘생명의 원천’은 한국의 빛 공해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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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Tasman Bay를 따라 이어지는 Abel Tasman Coast Track에서는 황금빛 해변과 청록색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을 만났다. 약 60km에 이르는 이 길은 조수 간만의 차를 고려해야 하는 독특한 코스로, 자연의 리듬에 맞춰 걷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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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는 South Island의 Kepler Track(약 60km)과 Stewart Island의 Rakiura Track(약 32km)을 연이어 걸었다. Te Anau 호수와 Luxmore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케플러 트랙의 능선 풍경은 장엄했고, 뉴질랜드 최남단 Rakiura에서는 ‘타오르는 하늘’이라는 마오리어의 의미처럼, 원시적인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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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친구들과 함께한 Heaphy Track(약 80km)은 Great Walks 중 가장 긴 여정이었다. Kahurangi National Park를 가로지르며 고산 초지에서 아열대 숲, 그리고 서해안의 야자수 군락까지 이어지는 다양한 생태 환경은 뉴질랜드 자연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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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친구와 단둘이서 그간 망설여왔던 Whanganui National Park의 Whanganui Journey를 통해 색다른 도전을 했다. 이곳은 걷는 길이 아닌, 카약을 타고 강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이다. 중간 중간 카약을 정박하고 주변의 원시림과 마오리 유적을 탐사하기도 한다. 3~5일 동안 스스로 노를 저으며 흐르는 강 위에서, 자연의 흐름에 나 자신을 맡기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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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Routeburn Track(약 32km)에서는 Fiordland와 Mount Aspiring National Park를 잇는 고산 능선을 걸으며, 만년설과 빙하 호수, 폭포가 어우러진 장엄한 풍광을 마주했다. 이로써 나는 마침내 9 Great Walks를 완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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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2019년 새롭게 개장한 Paparoa Track은 2010년 발생한 Pike River 광산 참사 희생자 29명을 기리는 길이다. 그러나 곧바로 찾아온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닫혀 있던 이 길을 2022년에야 걸을 수 있었다, 55km 내내 이어진 장대비는 마치 자연이 함께 애도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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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이어 2024년, Southland 지역의 Hump Ridge Track이 개통되었다. 그동안 여러 트랙을 함께 했던 두 친구와 출발 4개월 전부터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한 친구는 낙상사고로 다른 친구는 출발을 불과 며칠을 남기고 질병으로 동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홀로 길을 나섰다. 약 61km, 3일간의 순환 코스. 첫날 800m 이상을 거의 수직으로 오르는 구간과 수천 개의 계단은 육체적 도전이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것은 고요 속에서 마주한 나 자신이었다. 바다와 산, 원시림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나는 걸어온 삶을 돌아보았고,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은혜였음을 깨달았다.
총 600여km, 15년에 걸친 여정. 오십대에 시작해 칠십을 넘긴 지금까지, 나는 단지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걸어왔다. 카메라에는 풍경이 담겼지만, 그 안에는 기억과 인연, 그리고 감사가 함께 담겨 있다.
이제 나는 그 기록들을 정리하며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열두 번째 Great Walk이 열리게 된다면, 나는 다시 그 길 위에 은혜로이 설 수 있을까? 그 질문을 가슴에 품은 채, 오늘도 나는 다음 빛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