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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키위 구두약의 나라 뉴질랜드에 첫발을 내딛다
내 글의 변(辨): 나의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하며 이 글은 44년 뉴질랜드 이민사의 흔적 단면을 기록한 것입니다. 관계된 분들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실명과 구체적인 상호는 일부 생략하거나 범용적인 명칭으로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우리 교민 사회에 남긴 상처와 교훈만큼은 추호의 거짓 없는 사실에 가깝습니다. 혹 제 기억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당시의 양상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다른 교민들과는 조금 다르게 이른 시기, 1982년 11월 뉴질랜드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알던 뉴질랜드 소식은 참으로 부족했습니다. 그저 대양주 호주 옆의 작은 섬나라이자 영연방 국가 중 하나로만 알았지요.
어린 시절 기억 속의 ‘키위(Kiwi)표 구두약’이 뉴질랜드 상품이 아닐까 짐작했을 뿐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구두약은 호주 분이 만든 것인데, 사장의 부인이 뉴질랜드인이라 그 이름을 땄다고 하더군요.
한국전쟁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그 구두약의 이름이 제게는 뉴질랜드와의 첫 연결고리였습니다.
드네딘의 싸늘한 봄, 그리고 홀로 남겨진 시간 처음 뉴질랜드에 올 기회가 생겨 저 홀로 드네딘(Dunedin)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현지 회사인 ‘Wilson Neil Co.’의 스폰서로 워크 비자(Work Visa)를 받아 왔지요. 도착 초기는 무르익은 봄 시즌이었는데, 화창한 날씨에도 제가 느끼는 기온은 제법 싸늘했습니다.
한국 측 김ㅇㅇ사장님 내외와 함께 다섯 명이 녹용 가공 작업을 했습니다. 건조가 끝나고 상품이 한국이나 홍콩으로 수출될 시점이 되자, 함께했던 분들은 모두 귀국하고 저보다 몇 살 젊은 친구인 박ㅇㅇ와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조금의 자유 시간이 생겨 근처 볼거리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멀리 크라이스트처치까지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남겨둔 아내와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넘쳐났지만, 곧 함께 살게 될 나날을 꿈꾸며 정착의 첫해를 보냈습니다.
1년 4개월 만의 재회
오클랜드 공항의 기적 뉴질랜드의 봄 직전 8월 말은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시기입니다. 사슴뿔이 솟아올라 상품 가치가 가장 높은 48~55일 사이에 녹용을 잘라 건조 작업을 마치고 나면, 다시 함께 했던 한국인들이 떠나고 홀로 남겨질 외로움이 찾아왔습니다.
드넓은 벌판과 큰 산이 장벽처럼 둘러싸인 드네딘 공항 가는 길을 홀로 운전할 때의 기분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던 1984년 2월, 드디어 가족과 헤어진 지 1년 4개월 만에 오클랜드 공항에서 재회했습니다. 아직 걸음마도 못 떼었던 아이가 공항 출구를 아장아장 걸어 나오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 가족의 3식구가 함께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드네딘으로 향하던 길, 그 마음의 평안함 덕분인지 비행기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박 ㅇㅇ사장님이 픽업을 해 줘 드네딘의 집에 토착하고, 이방인들과의 교류,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들 드네딘에는 저희 가족뿐이었지만, 영어 학교에 다니며 베트남, 캄보디아에서 온 난민들과 태국 유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정서를 공유하며 그들을 집으로 초대해 한국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즐겁고 귀한 교류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느덧 제 나이 77세가 되었습니다. 평생 글쟁이 소질도 없던 제가 이런 글을 올리는 이유는,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어, 저 사람이 아직 여기 살고 있었나?” 혹은 “저 글에 무언가 울림이 있네”라고 한 번쯤 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별 볼 일 없는 글이라 탄로 날까 걱정도 되지만, 이 나이에 창피함 정도는 무릅쓰고 배짱을 부려보려 합니다.
제 컴퓨터 안에는 십수 년째 적어온 일기와 80여 편의 ‘나의 이야기(My Story) A4 규격 230페이지’ 자서전이라 하면 놀라실까봐 그저 내 이야기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60여 편의 수필이 잠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반응이 시덥지 않으면 1회성으로 그칠지도 모르겠지만, 노인네 한 명이 저질러 놓은 일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아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