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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코어카드를 손에 쥐고 라운드를 시작한다. 한 홀 한 홀마다 몇 타에 공을 넣었는지를 적어 내려가며, 18홀을 돌고 나면 총합이 자신의 하루 실력을 말해준다. 하지만 과연 그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가?
나는 골프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스코어카드를 모았다. 어떤 날은 기분 좋게 80대 초반의 스코어를 냈고, 어떤 날은 바람과 벙커와의 사투 끝에 100타를 넘긴 날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진짜 기억에 남는 날은, 스코어가 좋은 날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기고, 동반자와 웃으며, 내 샷 하나하나에 집중했던 날이었다.
골프는 숫자의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의 게임이다. 단 한 타 차이로 기뻐하고 아쉬워하지만, 그 차이를 만든 건 기술보다 집중력, 태도, 상황 대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바로 ‘과정’이다.
스코어는 결과지만, 과정이 없으면 결과는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살아가며 여러 숫자와 지표에 매달린다. 학점, 연봉, 나이, 집 평수, 자녀의 성적… 이 모든 숫자들이 마치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숫자는 단지 ‘결과값’일 뿐, 그 사람의 진짜 인생을 말해주는 지표는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70타를 쳤다고 해서 그가 정직했는지, 동반자에게 배려했는지, 벙커에서 예의를 지켰는지는 알 수 없다. 반대로 100타를 친 사람도 누구보다 겸손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동반자를 기쁘게 한 사람일 수 있다. 숫자가 말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진짜 골프의 이야기이고, 인생의 이야기다.
인생의 스코어카드에도 숫자가 적힌다. 나이 30에 무엇을 했고, 50에 어디까지 올랐으며, 은퇴할 때 어떤 자산을 가졌는지.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는다. 그 숫자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숫자를 만들어온 하루하루의 과정이 더 값졌다는 것을.
나는 이민자로서 뉴질랜드에서의 35년을 살아오며 수많은 과정을 거쳤다. 처음엔 숫자에 목말랐다. 통장 잔고, 매출, 고용 인원… 하지만 어느 순간,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실패에서 배운 지혜, 밤새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매 샷에 집중하는 것이다. 스코어를 미리 계산하고 조급해질수록 샷은 망가지기 쉽다. 인생도 그렇다. 결과만 보고 달리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의 노력, 사람들과의 관계, 나의 성장, 이것들이 바로 숫자보다 소중한 기록들이다.
오늘도 나는 스코어카드를 꺼내든다. 하지만 이제는 숫자만 보지 않는다. 그 숫자 뒤에 숨어 있는 내 마음과 노력, 동반자와 나눈 대화, 잔디 위의 바람까지 기억하려 한다.
숫자는 잊히지만, 과정은 남는다.
그리고 인생의 진짜 기록은, 바로 그 과정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