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별과 달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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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별과 달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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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봄이 왔다. 봄은 동사 ‘보다’의 명사형인가. 우리 눈앞에 많은 것들을 펼쳐서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푸른 별 지구는 제 살을 찢으며 싱그러운 생명체들을 대지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폭설로 국립공원 탐방로가 통제되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백양사에도 봄이 왔다. 백양사 도량에는 350년 된 매화나무 ‘고불매’가 있다. 봄의 전령사로 해마다 사진가들을 설레게 하고 또한 일간지를 통해 전 국민에게 봄소식을 전하는 홍매화다.


지난 1월 한 차례 폭설이 내렸다. 눈발이 된 비알을 훑으며 쏟아져 내리고, 백양꽃 진 자리마다 사박사박 눈이 쌓였다. 백두대간 끝자락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한 사내가 100호가 넘는 캔버스를 고불매 앞에 설치했다. 나는 며칠간 마당을 오가며 멀찌감치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름이나 보름 전후였을 것이다. 저녁예불을 마치고 나오던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화가는 깜박 잊은 것처럼 이젤에 그림을 올려둔 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남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해방감에 젖어 그의 그림을 맘껏 들여다보았다. 달빛 아래서 보는 그림은 오래된 벽화처럼 어둡고 칙칙했다.


어딘가 기이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검은 수피(樹皮)와 복잡한 노선처럼 얽혀있는 줄기와 가지들. 굳은 상고대는 칼날처럼 차갑게 빛났다. 어둠만 가득 찬 나무는 병든 짐승 같았다. 산새들에게조차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는 존재. 겨우 겨울을 버티고 있었다. 수많은 꽃잎과 향기를 몸속에 가둔 채.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나?”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들이 앞다투어 “물” 이라고 대답할 때, 한 아이가 “봄이 온다.”라고 대답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발상을 하는 사람들. 나는 담홍색 꽃이 만개한 봄철의 고불매가 아닌 죽은 듯 볼품없이 서 있는 1월의 고불매를 그리는 화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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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에게 따뜻한 쌍화차를 대접했다. 그의 얼굴에는 윤두서의 수염처럼 정확한 비율로 관리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불상화가’라고 소개했다. 오래전부터 전국을 다니며 불상을 찾아 그린다고 했다. 특히 태안과 서산의 마애불처럼 자연 석불을 주로 그렸다. 그는 이따금 외도하는 기분으로 나무를 그린다고 했다. 지난해엔 백양사의 비자나무를 그렸다. 습습한 가을바람이 비자나무 숲을 통과하는 오전. 숲에는 귤꽃 향기와 허브향이 진동했다. 그는 곧은 나무줄기를 그린 다음, 사방으로 가지를 펼쳤고 가지에는 무수한 ‘아닐 비(非)’ 자를 달았다.


“어쩌다 절에 있게 됐어요?”


화가가 내게 물었다. 그의 말은 왜 절에서 일하게 됐는지, 왜 하필 절집인지 궁금하다는 뜻일 터였다.


이럴 때 가장 간단한 대답은 ‘와이 낫?’이겠지만 좀 더 예를 갖춰 사찰에서 일하게 된 계기를 털어 놓았다. 가톨릭 모태신앙자였던 어머니는 말년에 절에를 다녔다. 일 년여의 투병 끝에 어머니는 멀리 떠났고, 나는 귀국한 뒤 주저앉아 전국 5대 적멸보궁을 순례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답은 가까운 곳에 있지요.”


화가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친절했고 눈길은 부드러웠다. 그의 어깨너머로 물음이 차곡차곡 들어찬 배낭을 짊어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내가 떠올랐다.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운문암에 가보셨어요?”


화가는 내게 운문암을 추천했다. 그곳은 공부하는 스님들이 상주하는 곳이라며 꼭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나는 이미 지난가을에 운문암을 다녀왔다. 구름이 지나가는 길목, 북서쪽에서 몰려오는 구름과 남서쪽에서 오는 구름이 모두 운문암을 지나간다고 했다. 오래전 선지식들이 온종일 화두를 참구하다가 머리를 식히려 바라보던 풍광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을 때, 가파른 능선이 불쑥 다가와 머리가 어질했다. 저 능선을 매일 바라본다면 마음도 칼날처럼 벼려져 두 눈이 절로 감길 것 같았다. 염화실과 운문선원을 지나 길 끝에 만들어진 우회로를 통해 칠성전으로 올라갔다. 하늘을 보며 별에게 길을 묻던 시절이 있었다. 북극성과 북두칠성, 치성광여래와 칠원성군, 일광보살, 월광보살. 겨울철 새벽,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면 북두칠성의 마지막 일곱 번째 별이 운문암 위에 떠 있다고 했다.


별을 보기 위해선 어둠이 필요했다.


운문암 칠성전 곁에 서서 겹겹의 능선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봄꽃들이 저 아래 길목에서 시작될 터였다. 어떤 사내가 봄을 찾아 종일 밖으로 쏘다니다가 봄이 보이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더니 매화나무 가지 끝에 이미 향기로운 봄이 맺혀 있더라는 선시가 생각났다.


화가는 나를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무수한 이해와 오해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때로는 오해가 삶의 원동력이 되는 때도 있다. 그의 오해는 오래전 방황하던 한때의 나를 호명했다.


긴 소송을 끝낸 것 같았다.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일들. 기도는 한심하고 허약한 방침 같았다. 화초를 키우기만 하면 자꾸 죽었다. 베란다에 방치된 화분들. 누군가 사주에 물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저녁이 되었어도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은 삭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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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점 없이 이어지는 날들. 조만간 침대에는 내 몸에 딱 맞는 구덩이가 생길 것 같았다. 모로 누워 보내는 하루. 어디선가 꽃향기가 풍겨왔다. 그 향기는 마침내 침대에 이르러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는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아주 오랜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은 창고 같은 베란다에서 꽃향기가 새어 나왔다. 몇 해 동안 꽃을 피우지 않던 치자나무. 꽃향기는 내 발목을 휘감고, 어깨를 두드리더니 마침내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고개를 드니 달은 보이지 않고 밤하늘만 공중에 조각나 있었다. 문득, 달을 곁에 두는 일상이 그리웠다. 어디에서나 달이 보이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생경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한결같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달. 그런 달을 닮은 사람이 떠올랐다. 몸만 여기 있고 마음은 거기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집을 정리할 때, 가장 골칫덩이는 책이었다. 이미 몇 차례 중고 서점에 보냈는데도 수백 권의 책이 남아 있었다. 배짱 좋게 싸우자고 덤비는 적군 같았다. 개중에는 너무도 아끼는 책들이 있었다. 버리더라도 내 정신이 감응한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 연필로 그었던 밑줄을 지우개로 지워가며 밤을 새웠다. 내가 그은 밑줄은 어쩐지 나 자신을 아주 취약한 상태로 노출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또 한 번 책을 중고 서점에 내놓자 붉은 펜으로 밑줄을 그은듯 뚜렷한 자책이 밀려왔다. 한참 동안 책갈피에 얼굴을 파묻고 책 냄새를 맡았다. 당신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 관해 얘기하는 걸 다시 듣고 싶었다.


햇볕의 따사로움을 느끼기 위해선 겨울이 좋다. 아니 초 봄이 더 좋겠다. 너무 추우면 햇볕을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길에 문득 창밖의 세상이 트레이싱 페이퍼를 대고 보는 것처럼 뿌예질 때, 떠난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때 햇볕이 내 속눈썹에 내려앉는 느낌. 따사로운 인사, 멀리서 보내오는 안부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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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게 말 거는 존재들의 손길.


화가는 1톤 탑차에 그림을 싣고 절을 떠났다. 떠나기 전, 백양사의 가을만큼 백양사의 봄이 아름답다고 내게 말했다. 애기단풍의 연둣빛 새순과 회색 톤의 공기가 어우러져 절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했다.


환한 대낮에 본 그의 그림은 밤과는 사뭇 달랐다. 막 승천하는 흑룡처럼 나무는 꿈틀거렸고, 나무를 에워싼 공기는 분홍을 섞은 흰색으로 화사하게 퍼져 있었다. 단 하나의 꽃만 피우는 나무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아무런 초상권도 행사하지 않는 고불매. 마침내 모두의 고불매가 꽃을 피웠다.


* 임택수 장성 백양사 템플스테이 팀장. 2024년 단편소설 ‘오랜 날 오랜 밤’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데 이어 장편소설 ‘김섬과 박혜람’으로 제20회 세계문학상을 동시 수상하며 등단했다. 매일 새벽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사찰이라는 공간에 기대어 매순간 새로운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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