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대통령의 말’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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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대통령의 말’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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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지난 일본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은 윤 대통령의 방미를 가슴 졸이며 지켜봤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그의 말들이 국내외에서 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탓이다. 국민이 대통령의 ‘입’을 염려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연설문 실무를 담당했던 강원국 필자는 대통령이 말로써 네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고 지적한다. 위기 관리, 갈등 조정, 문제 해결, 국익 신장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대통령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직분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고 필자는 말한다. ‘검사의 말’과, ‘대통령의 말’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편집자 주]



옛말에 ‘눈 먼 말 타고 벼랑을 간다’는 말이 있다. 매우 위태롭다는 뜻이다. 앞을 못 보는 말을 타고 벼랑길을 가니 얼마나 조마조마하겠는가. 요즘 우리 국민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물가는 치솟고, 경제와 안보는 벼랑 끝에 몰려 있는데, 이 위태위태한 시기에 ‘눈 먼 말’을 타고 가는 격이다.


이 위태로운 시기에 ‘눈 먼 말’을 타는 심정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선임행정관을 1년 정도 했을 즈음, 연설비서관 승진 인사가 났다. 감사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경제 관련 연설만 써왔던 내가 국정 전반의 연설문 초안을 최종 감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니. 비서관이 될 줄 알았으면 경제 외에 다른 분야 연설에도 관심을 기울였을 텐데 그러지 못했고, 비서관이 되었다고 역량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도 아니기에 앞이 캄캄했다. 행정관 분들에게 ‘나도 초안을 쓸 테니 글을 고치는 것은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행정관들이 도와줬다. 그 덕분에 노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까지 비서관 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어디 비서관 자리뿐이겠는가. 회사 팀장이건 부서장이건, 공직의 국장이건 장·차관이건, 심지어 아빠 엄마 역할이건 모두, 첫 시작은 처음 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삶은 끊임없는 새로운 시작이다. 이전에 잘했다고 새로운 일도 잘하란 보장이 없다. 연애를 잘했다고 결혼 생활도 잘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팀원으로서 일을 잘했다고 팀장 역할까지 잘하란 보장이 없다.



누구도 모든 말의 영역에서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


말도 그렇다. 기업인의 말에 능숙했다고 정치인의 말도 잘하란 법은 없다. 법조인의 말, 외교관의 말을 잘 한 사람이 방송인의 말에서는 ‘고문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누구도 모든 말의 영역에서 처음부터 잘할 순 없다. 그러므로 잘나갔던 사람일수록 교만은 독이 된다. 성공 경험에 도취되어 그것을 고수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성공이 우연과 운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더 겸허하게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처음 하는 일을 잘하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첫째, 사전에 준비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둘째, 시작하고 나서 열심히 배우는 것이다. 셋째,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첫째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고, 세 번째 방법으로 처음 하는 일을 치러낼 수 있었다.


한낱 비서가 그럴진대, 대통령 자리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응당 충분히 준비된 사람이 앉아야 하는 자리다. 시작부터 실전이고, 국가의 명운과 국민의 안전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질과 역량, 경험을 고루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면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 총 쓰는 방법을 모르는 어린아이 손에 총을 쥐여준 꼴이 된다. 그만큼 엄중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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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셔터스톡


역량이 있는 사람에게 맡기거나, 열심히 배우고 학습하거나


그럼에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두 가지 길이 남아 있다. 역량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거나, 열심히 배우고 학습하는 길이다. 세상사 별 거 있냐고 거들먹거리면서, 동네 방죽에서 헤엄치던 실력으로 드넓은 바다에 겁 없이 뛰어든 것까지 나무랄 순 없다. 오히려 용기가 가상하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막상 해보니 모든 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때라도 정신 차리면 된다. 열심히 배우면서 자신을 바꿔나가고, 그 또한 여의치 않으면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그런데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처음 해보는 일이라 그렇고, 지난 정부에서 잘못해서 그렇다면서, 과거에 같이 놀던 사람들하고만 일을 도모하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대통령의 말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입방아에 오르고 지지율이 내리막을 걷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누누이 지적하지만, 정작 본인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따라서 고칠 마음도 없다. 바뀔 생각이 없으니 배우지 않는 것은 물론, 남의 말도 듣지도 않는다.



대통령의 말이 하는 네 가지 역할 


대통령은 말로써 네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위기 관리, 갈등 조정, 문제 해결, 국익 신장이 그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기, 외환위기를 필두로 북핵 위기, 카드채 위기 등 크고 작은 위기를 경험했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위기를 잠재우는 노력과 함께, 위축과 동요로 인해 더 큰 위기를 불러오지 않도록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말했다. 위기에 버금가는 핵심 현안인 갈등 조정에 있어서도 이해 당사자의 입장을 세심하게 고려하고 심혈을 기울여 말을 다듬었다. 또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문제 사안의 해법과 대책, 개선안을 내놓기 위해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경제와 민생, 외교 현안에 있어서도 국익 신장과 국민 행복의 증진, 특히 약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정책을 만들고 제도를 정비했고, 이 모두가 말로써 이루어졌다.


만약 대통령의 말이 위기를 잠재우기는커녕, 위기를 조장한다면? 혹은 갈등을 조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갈등을 부추기고 문제를 일으킨다면? 같은 정책을 두고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고, 자신이 한 말도 다르게 말했다고 주장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지도자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다. 간절히, 절박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이루고 싶은 일에 관해서 말하고 싶어 한다. 남북 화해 협력,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청산 등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 있고, 그것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한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설득하고, 사람들과 힘을 모아 그 일을 이루고자 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정치의 이유이고, 말하는 목적이다


그렇다면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탐구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도를 찾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를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게 정치하는 이유이고, 말하는 목적이다. 적어도 내가 지켜본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은 그랬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일이 없는 사람은 꼭 해야만 하는 말도 없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있을 뿐이다. 그런 말은 가까이 있는 사람 말고는, 대다수 사람에게 외면당한다. 자신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란 걸 금세 알아챌 뿐 아니라 공감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도자답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게 된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말’을 해야 한다


지도자의 말은 자기 말이지만 자신의 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모든 지도자에게 사적 발언은 없다. 그들의 모든 발언은 공적이다. 공적인 말은 ‘내가 알아서 할게’여서는 안 된다. 사전에 충분히 조율하고 조탁해서 내놓아야 한다. 지도자는 개인 아무개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대통령은 검사가 아니다. 검사의 말은 승패의 언어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피아 구분이 명확하다. 내 편과 네 편,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만 있을 뿐 중간은 없다. 타협과 절충도 없다. 어떤 조직 안에서는 비속어를 쓰는 게 동질감과 힘의 우위를 확인하는 것일 수 있다. 또 말을 거칠게 해도 제지받거나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으니 눈치를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도자의 말은 그래선 안 된다.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말이 있고, 대통령이면 대통령답게 말해야 한다.


또한 지도자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만 말하는 게 아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다. 앞에 있는 사람을 만족시키는 말이 누군가의 불만을 살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말해야 한다. 시점도 지금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미래를 사려 깊게 감안해야 한다. 지금은 옳지만 훗날 그르다는 평가를 받을 염려는 없는지 숙고해야 한다. 대통령의 말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고, 대통령의 말 자체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출처: 피렌체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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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원국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증권회사 홍보실, 대우그룹 회장비서실 등을 거쳐 대통령의 스피치 라이터로 8년간 일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는 연설비서관을 맡았다. 저서로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가 있다. 각종 강연을 통해 ‘좋은 글쓰기’를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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