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음에도 장례식장에 가보려 하지 않으신다. 생전에 정이 별로 없음이기도 하거니와 치매를 앓고 계셔서 경황이 없으시기도 하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으시더니 애기처럼 되어 가신다.
“애미야 이리 와 봐라.”
할머니는 거의 매분마다 가족들을 부르신다. 가보면 주로 손을 잡아 달라거나 일으켜 세워달라거나 하는 것들을 부탁하신다. 별로 부탁하실 것이 없어도 부르신다. 불안하시고 외로우신가 보다.
어머니는 처음 시집 왔을 때 할머니가 그렇게도 무서우셨단다.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고 한다. 다른 식구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하시다가도 며느리인 자신에게만 그리 호되게 대하실 때마다 참 많은 상처가 가슴 속에 점점이 박혀 홧병이 되었단다. 그러고도 20년간 따스한 눈길을 못 느끼셨단다. 너무나 사랑하던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상실감을 어찌할 수가 없으셨나 보다.
그렇게 밉던 시어머니가 이제는 애기처럼 되어서 자신을 부를 때마다 어머니의 느낌도 남다를 것 같다. 가끔씩 어머니는 할머니께 이렇게 묻는다.
“어무이, 그때 나 혼냈는 거 기억나는교?”
할머니는 갑자기 어색하게 무표정해져서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어머니는 가슴 속 얽힌 실타래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간다.
“다 내 업보다. 업보를 닦을 수 있는 기회니까 고마운 일 아니겠나.”
어찌 고맙기만 할텐가. 가슴을 치고 통곡한 세월이 어디 하루 이틀이겠는가. 원망하고 원망하다 가슴이 문드러져 이제는 그만하자 포기하자 했던 수 많은 세월이 뇌리를 스쳐가실 게다. 하지만 더 기억해 무엇하리. 모두 다 내 탓이다. 모두 다 내 업보다. 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원인없는 결과가 있을손가. 모두 다 내 탓이다.
어머니는 그 동안 쌓인 울화를 삼키고 녹이고 울어내고 또 다시 삼키어 그 속에서 사랑을 증류해 내신다. 할머니의 마음도 사랑이었음을. 모두 다 사랑임을 알아내신다.
또 다시 할머니는 어머니를 부르신다.
“애미야 내 손 좀 잡아도고”
“어무이, 왜 진작 안 그러셨습니꺼.”
어머니는 따스한 눈길로 할머니를 바라본다. 할머니의 눈빛도 더 없이 자애롭다.
사람들은 때때로 깨닫는다. 모두 다 사랑임을.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만의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저마다 대처하는 방법은 다르다. 많은 이들은 마음의 상처만큼이나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자신을 미워하지만, 어떤 이들은 마음에 생긴 상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 ‘상처’라는 마음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것은 사랑이 되고 감사가 되어 세상을 뒤덮는다.
그것이 세상을 덮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서 주변의 몇 명을 덮는가 싶더니 어느 새 도시를 덮고 나라를 덮으며 천하를 덮는다. 그리고 그 힘은 돌고 돌아 나에게로 오니 어느새 세상은 순화(純化) 되어간다.
오호라! 나는 이미 순화시대(純化時代)에 살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