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보따리를 풀고 한참 지나서 처음 나드리 가 본 곳이 ‘쉑스피어 팍’이었다. 벌써 십년도 더 지났지만 처음 느낀 인상 때문인지 갈 때마다 기분이 좋다.
내가 사는 곳과 또 다른 분위기에 늘상 감동 받으며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 내가 살고 있음을 다시금 실감케 한다.
그 아름다운 도시 ‘왕가파라오’의 예쁜 집들을 뒤로하며 반도 끝자락 ‘쉑스피어 팍’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상큼한 바람이 차갑게 볼에 와 닿는다. 밤을 영글리고 감을 주황색으로 붉혀가는 가을 햇살은 눈부시고 찬란한데도 말이다. (아~~ 기분좋다.) 황량하게 너른 풀밭에 사람도 별로없어 한없이 조용하다. 오늘 하루 내 것으로 소유해도 되는 이 한 귀퉁이 우주가 나를 마냥 부티나고 들뜨게 한다.
수령(樹齡)을 알 수 없는 고목들이 방패처럼 나열 돼 있는 파크 끝자락. 둔덕으로 올라서니 거긴 또 딴 세상으로 열린 바다가 반겨준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하얀 돛단 배 하나가 유유히 그림처럼 떠 있다. 배치가 잘 된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물을 차고 위로 비상하는 갈매기들의 곡예도 이 곳에 서 있는 나를 환영 해 주는 듯하다. 살아있음에 축복받는 이 경이로운 조물주의 신비에 새삼 놀라울뿐이다. 때 늦은 물놀이로 신바람 난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내 눈 앞으로 펼쳐지는 낡은 영상과 만난다.
아! 내 고향 ‘마포나루’. ‘한강’은 내 유년의 놀이터였다.
검정 고무신 벗어들고 치마 젖는줄도 모른채 송사리떼 몰고 다니던 강가가 떠 올랐다. 빨래하는 엄마 곁에 앉아 물장난을 치는 어린 계집애. 무수히 출렁대는 배들 사이로 무겁게 짐을 실은 큰 배가 들어오면 왠지 모르게 설레어 뛰어갔던 어린 마음. 누군가가 반길 사람도 없는데....
햇살 좋은 날 수도 없이 물에 적셔 강 뚝에 널어 말리는 누우런 깃광목. 그것은 나중에 백옥같은 옥양목으로 탈바꿈을 한다. 언니의 혼수감으로 일찍이도 준비하는 어머니의 정성이었다.
하지만 엉뚱한 용도로 쓰이고 말아 버릴줄 그 누가 알았으랴.
언니의 이불감이라는 말을 들으며 “큰 언니는 우리랑 같이 자는게 싫은가봐”라고 쫑알대던 철없던 재롱둥이 동생. 훗날 그 천은 그 아이의 이 세상 마지막 옷감이 되고 말았다. 눈처럼 새-하이얀 옥양목 옷을 입고 한 겨울 하얀 눈 세상에 하늘나라로 떠난 아이.
1. 4 후퇴 피난지에서 홍역으로 죽은 일곱살짜리 딸의 수의를 지으며 피난살이 남의 집 곁방에서 마음놓고 울지도 못하고 안으로만 참아내던 어머니의 표현할 수 없는 그 처절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이 가장 슬플 때. 저절로 만들어지는 표정이 어떤 것인지 나는 그 때 일찍이도 알게 되었다.
저-어쪽 하늘에 방금 목화 송이가 터지듯 눈시리게 흰 구름이 피어 오른다. 그 구름 속에서 방싯 웃는 동생의 귀여운 얼굴을 본다. 오랜 세월 잊고 살았지만 아직도 내 가슴속엔 그 애가 살아 있었을까? 아니면 그 애의 세상에 함께 할 날이 가까워진다는 깨달음 때문인지.....
형용 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휘말려 경직된채 멍하니 서 있는 찰나다. “물 빛깔이 너무 예쁘죠” 누군가가 곁에 와서 내 꿈은 현실로 돌아왔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파란 하늘. 그 끝에 잇닿아 잇는 바다. 하늘도 바다같고 바다도 하늘같다. 누구 마음을 뺏으려고 저리도 빛깔이 고울까? 거기 한 점 돛단 배. 주위에 갈매기들의 군무가 한창인걸로 보아 물고기들이 많은가보다. 낚시꾼들의 넉넉한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억겁(億劫)의 세월에 간직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었을 저 바다. 물결이 핥고 지나간 모래톱엔 새들의 먹이가 되었을 빈 조가비들이 밀려든다. 그들은 바다속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
그동안 일행들이 모두 도착 했나보다. 뒤쪽에서 조금씩 시끄러워지는 분위기다. 초록 풀 밭에 꽃잎처럼 흩어진 사람들. 130여명 대 식구가 여기 저기 모여앉아 무슨 이야기들을 하실까?
인생 소풍놀이 끝자락에 선 7. 80대 어른들의 바깥 나드리가 흥분으로 들뜬 것 같다. 6. 25 전쟁과 정변(政變) 등. 소용돌이 속에서 굴곡 많은 시대를 정신없이 살아온 세대들로 그 어느 세대보다 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늙어 볼품없는 모습으로 이 곳에 있지만 부하들을 수 십명씩 거느렸던 대단한 분도 있을테고 시골에서 소 팔고 논 팔아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 하신 분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자식들 덕에 좋은 나라 이렇게 평화로운 자연속에서 오늘같은 대접도 받고 있으니 자식 농사는 성공한 사람들이다.
새색시 걸음으로 와서 스치는 바람결에도 선뜻한 한기를 느끼고 옷깃을 여미는 늙 어린이들. 바닷가에 벗고 노는 아이들과 너무 대조적이어서 서글픈 웃음이 나온다.
바람 한 점 없어도 파도는 밀려온다. 가만히 있어도 밀려오는 세월에 나이를 먹고 어느새 이만큼 늙은이가 되었다.
세월에 부대낀 돌들이 모래알이 되었듯 저 한 점 모래알 같은 인생.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다’란 말이 생각났다. 회자정리(會者定離)란 공평한 진리의 말도 있어 그나마 위로를 받는다.
누군가가 던져준 먹이를 물고 힘차게 날아 오르는 갈매기들이 새삼스러운 교훈을 준다. (그래, 그냥 그렇게 열심히 살아 가는거야)라고....
오늘의 자리를 만들어 주시고 봉사 해 주신 모든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