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철씨 일가가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던 날, 첫마디는“따뜻한 남쪽 나라”였다.
그들이 당시‘따뜻한 남쪽나라로 목표한 것은 원래 대만이나 베트남인가였다'는 후문도 있었는데, 어쨌거나 그들은 그렇게 남쪽의 따뜻한 나라를 찾아 생사를 걸었던 것이다.
나는 가끔씩 이해를 못했었다. 몇 년씩 외국 나가 살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다니러 온 고국이 오히려 어색한 듯 서둘러 떠나는 모습을 보고 이방인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또 나는 이해를 못했었다. 코 큰 사람들이 낯선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면서“제2의 고향이 어떻고, 이 땅에 영원히 묻히고 싶다”면서 초연함을 보일 때 지어내는 여유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80년대부터 시작된 해외 나들이는 해가 갈수록 내게는 거의 무의식적인 동경으로 다가 왔다. 도대체 금수강산이라는 우리나라 시골 풍경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외국의 전원은 왜 그렇게 부러워했던가. 그러던 언제부턴가 지구가 한 마을이 되면서 꼭 한반도에서만 사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게 되었다. ‘더 넓은 조국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수사학적인 말은 차치하고 좀 더 조용하고, 여유로운 곳이 있다면 구태여 좁은 땅덩이에 4천만이 복닥거리며 사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리라.
그러다가 11년전 어느 여름 막연히 그리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긴 방황 끝에 찾은 파라다이스처럼, 발 뻗고 안주할 에뜨랑제의 마지막 휴식처 같은 느낌도 들고, 그건 아마 오래전부터 연이 닿았던 보이지 않는 끈이었는지도 모른다. 온 세상이 쾌적하고, 약속과 신뢰가 감도는 사회, 우격다짐과 속고 속이는 일이 아직은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세상-그 이름 뉴질랜드에 둥지를 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중국 때문에 “10년이면 대륙도 변한다”로 속담조차 바뀌어 가는 사이에 이 조용한 나라도 짧은 세월 동안 무척이나 변해 버렸다. 드디어 관광객이 피살 당하는 일도 생기고, “경비행기로 스카이타워와 부딪치겠노라”는 만화 같은 협박도 나오고. 그런가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어느덧 추억이 되어 버린 초창기 이민 사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호기심 속에 한가족씩 실은 차들이 줄지어서 타우랑가도 가고 코로만델도 가고, 뒷뜰에 오이 심고 깻잎 가꾸며 달팽이 약 사다 나누어 뿌려 주던 그 때가 좋았다고. 시내 한국식당으론 일미식당, 짜장면 집으로는 중국성 정도였던 그 때가 아기자기 했었노라고.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어느 사이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더러는 호주로 재이민 가고, 그래서 어느 때는 남은 우리가 초라해 보이기도 했는데….
무섭게 모여들어 3만이 넘는다던 교민들이 또 언제부턴가 썰물처럼 빠지더니 그사이 몇 천은 줄었다고 알려지고, 유학생마저 급감하면서 교민 경제는 움츠러들고 대부분의 삶이 회색빛으로 변해 버린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러나 실망하기엔 아직은 너무 빠르고, 잘못 왔다 후회하기엔 환경이, 삶의 모습이 지금도 너무나 고귀하다. 토비라는 개에게 투표용지가 나온 것도 부정이라기보단 자유로운 질서에 대한 투정으로 보이는 한낱 가십거리일 뿐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김만철씨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는 어쩌면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남쪽 나라엔 행복 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이 세상 어디에든 행복과 불행이 공존한다는 것을 느끼고. 언젠가 젊은 탈북자 대학생이 “분명 한국은 천국인 것 같은데 북한에서처럼 생활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던 것 같은 씁쓸함을 말이다. 때때로 뉴질랜드는 그림 속의 천국이고, 우리는 그 그림을 들여다보며 고달프게 사는 아웃사이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강산이 바뀌었어도 뉴질랜드는 탁월한 선택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죽는 게 무서워 자살한다”는 아이러니를 뒤로한 채, 엽총자살로 먼저 떠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노인과 바다'를 넘어‘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가면서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내일은 또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진리를.
많은 이들이 지금 힘들고, 지쳐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봄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다.
몇주 동안 그렇게 설쳐 대던 변덕스런 날씨도 어느덧 잠잠해지고 남태평양 특유의 쾌청한 날들이 다시 펼쳐지지 않았는가.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던 서정주 시인의 한 소절은 그래서 더욱 명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조금만 더 인내해야 한다. 그래야 찬란한 태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