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내 조국의 상황이고 지금의 모습이기 때문이고 한 인간으로써 희생당한 그 많은 영혼들을 위해 슬퍼하고 분노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직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상태이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은 그러나 예기치 않은 죽음 앞에서 타인들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가슴에만 담아두려는 문화적인 정서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누군가가 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때와는 달리 사고들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고 그로 인해 힘들어 하는 누군가에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서 오히려 위로보다는 상처를 줄 때가 많다.
필자의 친구가 아들을 사고로 잃었을 때 했던 말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그렇게 친했던 사람들도 연락하기를 꺼려하고 주저해서 힘들고 외로울 시기에 더 마음을 무겁고 힘들게 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감정을 누르는 연습들을 하며 살아왔고 오히려 그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문화적 배경 속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의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억누르고 담아두어야 하는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울 권리조차 없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남자아이들은 어려서 울면 약하다는 편견 속에서 길들여지고 커서도 그런 감정들에 미숙하고 누군가 그런 감정을 보여도 당황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게 성장한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어쩌면 부부가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서툴러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 등 감정은 표현할 때보다 담아둘 때 문제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표현에 서툴기 때문에 방법이 잘못되고 서툴러서 대화를 하려다가 더 감정적으로 상하게 되고 문제가 악화되는 경험들을 하게 되고 그 부정적 경험들은 다음 기회를 가지는데 두려움을 증폭시켜서 차라리 입 다무는 것이 낫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한국아이들은 여기서 자라도 그런 가정의 분위기 안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과묵하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견디고 참는 양태를 보인다. 그로 인해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상황들을 만나도 다시 참고 견디게 되고 위의 예처럼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서툰 표현들로 인해 되려 상처받는 상황에 처하고 나면 마음의 문을 더 닫게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보통 부모들은 아이들이 울고 있을 때 당황하고 문제 해결지향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이들이 품고 있는 감정들을 쏟아내도록 기다리고 허용하기 보다는 우는 것 자체를 참지 못하고 왜 울어 바보같이 라는 극단적 표현들, 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냐는 말들, 남자가 약해빠져서 라는 평가절하까지… 감정을 표현하면 돌아오는 불이익은 가정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울면 여러 사람들이 달려든다. 우선 상담교사한테 보내고 딘과 선생님들이 회의를 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위로와 격려하기 위해 노력해준다. 많은 부분들을 허용해주고 들어주고 학교에서 참아준다. 이는 참으로 반대의 현상인 것이다.
우리는 참기 때문에 눈물이 아니라 분노를 표출한다. 그것은 아주 부정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받아들여 지지 않고 또 다른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참으면 병이 된다는 말은 참는 결말은 나 자신을 파괴적으로 몰고 간다는 의미이다. 슬프면 울고 슬픈 사람이 있으면 옆에서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그런 건강한 감정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다시 한번 이 기회를 통해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