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거쳐가는 연례 행사로는 감기가 있다. 누구나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일 년에 두 번쯤 와버리는 불청객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불쑥 찾아와버리니 더욱 그렇다. 이 인간들보다도 지독한 바이러스들 같으니라고.
그나마 운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면역력이 괜찮아서인지는 몰라도 심하게 겪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다행이다. 코가 막히고 목이 따끔거리는 선에서 더 이상 진전되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고, 그래서 냄새를 못 맡고 맛을 못 느끼거나 목소리가 내 귀에도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정도의 소소한 불편함이라면 참아줄 수 있다. 당장 내 주변에만 해도, 감기에 걸리면 거의 일주일을 앓아 눕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감기. 참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하는 병이다.
어렸을 때는 감기야말로 공포의 상징이었다. 당장이라도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깥에 나가 뛰어 놀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린 나에게 감기는 곧 감금이었으니까. 감기라니, 감기라니! 그게 무슨 말이요, 의사양반! 내가 감기라서 나가질 못한다니!! 아무리 열이 펄펄 끓고 기운이 없어도 무조건 나가서 놀고 싶어했던 걸 보면 애는 애였던 모양이다. 물론 현실은 꼼짝 없는 침대행이었지만, 그래도.
거기에 감기에 걸리면 꼭 동반되는 어지럼증과 메스꺼움. 감기 자체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건 그 증상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가뜩이나 멀미를 잘 하고 어지러운 것에 약한 나로서는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느낌을 견디기 어려웠기에 약이든 뭐든 푹 자게만 해준다면 칭얼거리지 않고 기꺼이 삼켰다. 아마도 나처럼 약을 잘 받아 먹는 아이는 드물었을 것이다. 쓰든 말든, 그 보상으로 사탕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상관 없었다. 아무리 써서 고통스러워도, 일단 약을 먹고 나면 사탕보다 더 달콤한 잠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감기에 걸렸어도 일주일 이상 앓았던 적은 없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렸을 때처럼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적도 별로 없다. 감기로든, 다른 이유로든. 아, 사실 몇 번 있긴 있었다. 토할 것처럼 어지럽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고꾸라져서 바닥을 기다가 가까스로 침대로 기어들어간 적도 있었고,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내리 잔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은 그렇게 하루에서 이틀을 꼬박 잠으로 보내고 나면 금방 회복하는 편이다.
가끔씩은 못된 마음을 품곤 한다. 아, 한 번쯤 제대로 아파서 한 달 정도 꼼짝도 못 하고 침대에서 자기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이러니 저러니해도 남들에게 신경 쓰게 하는 것을 싫어하기에 아직 다 낫지 않았더라도 반억지로 몸을 끌고 일어나는 스타일이다. 아파도, 아픈 선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질 않기 때문인데 종종 이 습관 때문에 병이 나을 뻔 했다가 더욱 심해지는 일도 왕왕 있었다.
아플 때라도 좀 편히 다른 사람에게 모든 걸 - 일을, 잡무를, 나 자신을 - 맡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째서인지 나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내 일에 관해선 잘 믿지도 맡기지도 못한다. 행여라도 그럴라 치면 너무너무 불안해서, 결국 직접 나서고야 만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행히 이번 겨울엔 그 흔한 코감기조차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지만, 불행히도 이번엔 엄마가 감기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나보다도 더 심하게 앓는 엄마인지라 걱정이 태산이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