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글쓴이 : 류근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친구여 나는 시가 오지 않는 강의실에서
당대의 승차권을 기다리다 세월 버리고
더러는 술집과 실패한 사랑 사이에서
몸도 미래도 조금은 버렸다 비 내리는 밤
당나귀처럼 돌아와 엎드린 슬픔 뒤에는
버림받은 한 시대의 종교가 보이고
안 보이는 어둠 밖의 세월은 여전히 안 보인다
왼쪽 눈이 본 것을 오른쪽 눈으로 범해 버리는
붕어들처럼 안 보이는 세월이
보이지 않을 때마다 나는 무서운 은둔에 좀먹고
고통을 고통이라 발음하게 될까 봐
고통스럽다 그러나 친구여 경건한 고통은 어느
노여운 채찍 아래서든 굳은 희망을 낳는 법
우리 너무 빠르게 그런 복음들을 잊고 살았다
이미 흘러가 버린 간이역에서
휴지와 생리대를 버리는 여인들처럼
거짓 사랑과 성급한 갈망으로 한 시절 병들었다
그러나 보라, 우리가 버림받는 곳은 우리들의
욕망에서일 뿐 진실로 사랑하는 자는
고통으로 능히 한 생애의 기쁨을 삼는다는 것을
이발소 주인은 저녁마다
이 빠진 빗을 버리는 일로 새날을 준비하고
우리 캄캄한 벌판에서 하인의 언어로
거짓 증거와 발 빠른 변절을 꿈꾸고 있을 때 친구여
가을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잎사귀를 버린다
살아있는 나무만이 잎사귀를 버린다
♣ 류근: 문경에서 태어나 충주에서 성장,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대학 재학 중 지은 노랫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후 <상처적 체질>, <어떻게든 이별> 등의 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