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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처음 잡은 붓 한 자루의 인연을 타국 땅 뉴질랜드에서도 30여 년간 묵묵히 이어온 이가 있다. 10여 년 전부터는 ‘행복누리 아카데미’의 서예 교사로서 한인 사회에 묵향을 전하고 있는 산정, 이정봉 서예가가 그 주인공이다. 이제 서예는 그에게 단순한 취미나 특별한 예술 활동을 넘어,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뉴질랜드에서의 ‘일상’ 그 자체가 되었다. 건강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붓을 놓지 않겠다는 이 정봉 서예가. 검은 먹물 속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녹여내는 그의 정갈한 서예 인생을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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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으로 여는 인생 2막, 나눔의 보람
행복누리 원장의 정중한 부탁으로 서예 아카데미의 문을 연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뉴질랜드에 이민을 온 지 30년이 되었으니, 초등학교 시절 처음 먹을 갈았던 때부터 시작된 나의 붓글씨 인생도 이제 60여 년의 세월을 넘기고 있다. 서예 교실을 찾는 수강생들은 대부분 이민 1세대로, 먹 향기를 맡으며 고국의 정취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최근에는 서예 특유의 정적인 매력에 매료된 일본인과 중국인 수강생들까지 수업에 합류하고 있다. 이들과 함께 필법을 논하며 국경을 넘은 문화 교류의 장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남다른 보람을 안겨준다. 붓글씨를 가르치는 나 역시 은퇴 후의 인생 2막을 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해 매 순간 정성을 다하고 있다. 단순히 가르침에 머물지 않고, 1년에 두 번 정도는 10여 명의 수강생과 함께 정기적인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전시회는 그동안 갈고 닦은 서로의 실력을 교류하며 서예가 주는 성취감을 함께 나누는 소중한 축제의 장이 된다.
묵향에 실어 보낸 60년, 어린 시절의 시작
초등학교 서예 시간, 정성껏 써 내려간 붓글씨를 보며 선생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기억이 선하다. 교실 뒤편에 내 글씨가 붙을 때마다 어린 마음에 느꼈던 그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서예 인생의 소중한 첫걸음이 되었다. 그 기분 좋은 기억 덕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도 서예를 손에서 놓지 않고 집중적으로 정진할 수 있었다. 나에게 서예는 단순한 공부라기보다, 은은한 묵향 속에서 나의 생각과 느낌을 오롯이 표현해내는 즐거운 유희와도 같았다. 대학 졸업 후 공직에 근무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붓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붓글씨의 가장 큰 매력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순간 찾아오는, 상상 그 이상의 자유로운 표현력에 있다. 화선지 위에 먹이 번지는 찰나의 미학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다.
외국에서의 그리움을 붓글씨로 나눠
30년 전 뉴질랜드로 이민을 오게 되면서,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다시 한번 붓글씨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비록 화려한 단체 활동이나 전시회를 열지는 않았지만, 이곳 뉴질랜드에서 붓을 잡고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에는 큰 기쁨과 위안이 찾아왔다. 이민 생활 중 생계를 위해 다양한 직업을 거쳤지만, 특히 페인트 회사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며 붓을 잡았던 시절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서예용 붓과는 달랐지만, 거친 페인트 붓을 잡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정갈한 서예의 필법을 떠올리곤 했다. 이제는 서예 아카데미에서 수강생들과 함께하며, 그동안 쌓아온 나의 묵향 인생을 나누는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동남부 한인들의 활력, ‘행복누리 아카데미’
2012년 ‘실버스쿨(현 시니어 아카데미)’이라는 이름으로 어르신들을 위해 첫발을 내디뎠던 행복누리가 어느덧 10여 년의 세월을 지나 서예 클래스를 포함해 매주 250여 명의 한인이 참여하는 20여 개의 클래스를 갖춘 대규모 아카데미로 성장했다. 아카데미가 이토록 눈부시게 발전하며 동남부 지역 교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채워가는 모습을 볼 때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진다. 아카데미는 단순히 배움의 장을 넘어, 매일 한국어로 번역된 뉴질랜드 뉴스를 전달하며 동포들이 현지 소식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도록 돕는 정보의 가교 역할도 수행한다. 또한 행복누리의 활동은 뉴질랜드 현지 사회로부터 많은 응원과 상을 받으며 그 가치를 입증했다. 팬데믹 당시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크리스 힙킨스(Chris Hipkins) 당시 장관으로부터 감사 표창장을 받았다. 이에 더해 대한민국 외교부로부터 재외동포의 권익 신장을 통해 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장관 표창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붓글씨 입문과 도구 선택의 기초
붓글씨를 배우고자 하는 교민은 과거의 경험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처음 배우는 입문자도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힐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지도한다. 수업에 필요한 필수 준비물은 문방사구라 불리는 붓, 종이(화선지), 벼루, 먹(또는 먹물)이다. 도구는 개인이 직접 준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처음 참여하는 분들을 위해 상담을 통해 본인의 손에 맞는 붓과 적절한 도구를 고르는 방법을 상세히 안내한다. 입문 과정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누구나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다. 묵향과 함께하는 몰입의 즐거움을 통해 일상의 평온을 찾기를 바란다.
묵향의 전승,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
개인적으로는 지금처럼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꾸준히 붓을 잡고 싶다. 한때 폐강의 위기도 겪었으나, 지금 우리가 이 전통을 잇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강좌를 지속해 왔다. 앞으로는 더 많은 이들이 서예의 매력을 접할 수 있도록 성인반을 더욱 확대 개강하고, 청소년반과 외국인반 운영도 새롭게 계획하고 있다.
글, 사진: 김수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