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질랜드에서 “럭비”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블랭킷에 올블랙스 로고가 수놓아지고, 첫 생일에는 럭비공을 들고 사진을 찍는 나라.
그런데 1980~90년대, 이 세계에서 ‘여자아이가 럭비를 한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팔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사람들이 저를 볼 때마다 물었죠. ‘너 정말 럭비 하니?’라고요. 저는 되묻고 싶었어요. ‘왜? 내가 여자라서?’”
이 호기심 섞인 반항심은 결국 한 명의 여학생을 세계 최고의 여자 럭비팀, 블랙펀스(Black Ferns)의 전설적인 주장(캡틴)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훗날, 뉴질랜드 럭비 역사상 첫 여성·첫 마오리족 NZ Rugby 이사회 멤버라는 타이틀까지 스스로 개척해냈다.
그녀의 여정을 따라가 보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변화를 만드는 사람은 거창한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이다.”
파라 팔머의 성공요인 – ‘조용히 그러나 끝까지’
①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노력하는 사람
팔머는 팀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경기 중의 80분보다 중요한 건, 아무도 보지 않는 8,000분의 준비예요.”
블랙펀스가 세계 최강이 된 이유는 단순한 체력과 기술 때문이 아니었다.
선수들이 각자의 삶에서 분투하던 시절, 팔머는
공부·일·훈련·가족을 모두 병행해야 했던 팀원들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래서 그녀가 주장으로서 보여준 리더십은 ‘고함’이 아니라 ‘경청’이었다.
누가 힘든지, 누가 잠을 못 잤는지, 누가 내일 출근해야 하는지를 가장 먼저 파악했다.
그녀의 리더십은 이렇게 요약된다.
“가장 조용한 목소리를 먼저 듣는 것, 그게 진짜 리더다.”
② 마오리 정신 – ‘Whanaungatanga(와나우나탕가)’
팔머는 마오리 문화가 자신에게 준 가장 큰 선물로 “공동체의 힘,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꼽는다.
블랙펀스는 경기 전 haka를 통해 하나가 된다.
하지만 팔머는 말했다.
“하카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녀는 선수들과 함께 식사하고, 각자의 가족과 문화를 소개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팀을 하나로 묶는 힘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③ 배움에 대한 끝없는 갈증
“좋은 선수는 몸으로 뛰지만, 위대한 선수는 머리로 뛴다.”
팔머는 현역 시절부터 체육학·커뮤니케이션 연구를 병행했고,
은퇴 후에는 Massey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며 뉴질랜드 스포츠 사회학 연구에 기여했다.
그녀의 핵심 철학은 단순하다.
“경험은 지나가지만 배움은 축적된다.”
이 꾸준한 배움 덕분에, 그녀는 흑백논리가 아닌 구조를 보는 힘을 갖게 되었다.
이 힘은 훗날 NZ Rugby의 미래 전략을 논의하는 회의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핵심 가치 – 그녀를 움직이는 힘
① Integrity(진정성) –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힘
팔머는 “리더는 완벽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리더는 솔직해야 한다.”
가끔은 “오늘 너무 피곤하다”고 말했고, 가끔은 “이 전략이 확신이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솔직함은 약점이 아니라, 팀이 그녀를 따를 수 있게 만드는 신뢰의 언어였다.
② Mana Wāhine – 여성의 힘을 드러내는 방식
그녀는 “센 여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있는 그대로의 여자”가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표현이 특히 교민 여성들에게 울림을 준다.
“여성 리더십은 전투가 아니라 연결이다.”
이 철학 덕분에 뉴질랜드 럭비계는 여성 선수와 여성 지도자들의 자리를 점점 넓혀가고 있다.
③ Innovation(혁신) – ‘질문하는 사람이 미래를 만든다’
팔머는 이사회에서 늘 가장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왜 이런 정책은 남자 선수 중심인가?”
“지방의 여성과 소수민족 아이들이 럭비를 접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럭비는 단지 경기인가, 아니면 사회 통합의 도구인가?”
이 질문들은 결국 NZ Rugby의 구조적 변화를 이끌었다.
그녀의 혁신 방식은 거창하지 않다.
단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스토리의 전환점 – 블랙펀스 캡틴의 눈물
2002년, 블랙펀스는 중요한 국제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모두가 승리를 예상했지만, 팔머는 경기 전날 밤 혼자 울었다.
왜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이 팀을 너무 사랑해서요. 사랑하면 두렵기도 하잖아요.”
그녀는 완벽해서 팀을 이끈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이끌 수 있었던 리더였다.
그 눈물은 감독이나 선수들에게 숨기지 않았다.
도리어 공개적으로 말했다.
“우리 모두 두렵죠? 그렇지만 이 두려움도 우리가 함께 느끼면 용기가 됩니다.”
그 말에 선수들은 밤새 서로의 손을 잡고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 날 팀은 압도적 경기력으로 승리했고,
팬들은 그날을 블랙펀스 역사상 가장 ‘인간적인 승리’라고 기억한다.
팔머의 유머 – ‘럭비는 힘든데, 인생은 더 힘들다!’
팔머는 연설 중 종종 유머를 섞는다.
“럭비에서 가장 어려운 게 뭔지 아세요?
스프린트도, 태클도 아니에요.
경기 후 세탁기 돌리는 거예요!”
경기장에서는 불꽃 같은 주장(Captain)이지만, 집에 가면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유머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이 유머 감각은 마오리 전통의 '웃음으로 연결되는 문화'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NZ Rugby 첫 여성·마오리 이사회 멤버가 되기까지
팔머가 첫 여성·마오리 멤버로 이사회에 들어간 날, 기자들이 물었다.
“이제 무엇을 바꾸고 싶나요?”
그녀는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여성이나 마오리라는 이유로 온 게 아닙니다.
럭비가 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이 말은 뉴질랜드 사회 전반에 큰 울림을 줬다.
그녀는 상징적 인물이 아니라 실질적 변화를 만드는 구조적 리더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여성·소수민족 참여 확대 프로그램 설계
NZ Rugby의 다양성·포용성 전략 구축
지역 커뮤니티 럭비 프로그램 강화
선수 복지 시스템 개선
이 변화들은 지금도 계속 효과를 내고 있다.
팔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리더십은 힘이 아니라 행동이고, 행동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녀는 럭비 선수였지만, 그보다 더 큰 역할은 뉴질랜드 문화에 변화를 가져온 개혁가라는 점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지금도 어린 소녀들이 파슬리 잎처럼 작고 여린 손으로 럭비공을 잡는다.
그 소녀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꿈을 꾸는 이유 중 한 명은 바로 Farah Palmer라는 존재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