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IT 강국, 디지털 정부, AI 시대… 이런 단어들이 익숙한 21세기 뉴질랜드.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발의하는 법안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에는 여전히 ‘비스킷 틴(biscuit tin)’이 등장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뉴질랜드 국회에서는 의원들이 발의한 ‘개인 법안(private member’s bill)’을 심사 순서로 정할 때, 고풍스러운 양철 비스킷 틴이 등장한다. 이 틴은 1920년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겉보기엔 평범한 과자통이지만, 그 안에는 법안을 적은 종이들이 차곡차곡 담긴다.
국회 직원이 이 틴을 흔들고, 무작위로 종이를 뽑아 ‘오늘의 주인공 법안’을 결정한다. 첨단 컴퓨터 추첨 프로그램도, 자동화 기계도 아닌, 바로 이 손맛 나는 아날로그 방식이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
Members’ bill ballot biscuit tin on a desk at the Table Office at New Zealand Parliament.
Source: parliament.nz Office of the Clerk
디지털 시대에 이토록 ‘느긋한’ 방식이 남아 있는 이유는 뭘까?
국회 관계자들은 “공정성과 투명성, 그리고 약간의 유쾌함”을 꼽는다. 실제로 비스킷 틴 추첨은 의원들 사이에서 ‘국회판 로또’로 불리며, 매번 작은 이벤트처럼 즐거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뉴질랜드의 정치 문화가 ‘전통과 인간미’를 중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조작 의혹도 없다”는 점에서 신뢰를 얻고 있다.
뉴질랜드 국민들은 이 비스킷 틴을 ‘정치의 소소한 유머’로 여긴다. SNS에는 “우리 국회, 아직도 과자통 돌린다니 귀엽다”, “AI가 못 따라올 인간미”라는 반응이 이어진다.
뉴질랜드 국회의 ‘비스킷 틴 추첨’은 느리고 소박하지만, 그만큼 투명하고 인간적이다.
디지털 혁신과 전통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이 작은 의식은, 뉴질랜드 정치의 특별한 매력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