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 - 神 - 事
이(理)란 문자 그대로 이법(理法, principle), 섭리, 우주의 창조 법칙이다. 곧 자연과 인간이 태어나고 살다 죽는 대자연의 이법을 말한다. 인류의 기원과 인간의 삶의 목적, 인류의 미래 등 모든 것이 리理 자 속에 들어 있다. 이법理法을 알아야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이법을 제대로 깨야 사람이 밝아진다. 자연 속에 있는 숱한 이치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역사의 과정이요, 문명의 과정이다. 그렇게 해서 자꾸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간은 밤이 되면 불을 켤 줄 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바로 그 이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는 두 가지 전류 변화가 있다. 양전기, 음전기, 이것이 음양의 이치다. 우주 만유, 사물에는 두 가지 변화의 얼굴이 있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음적인 게 있으면 양적인 게 있다. 그 변화의 이치가 바로 음양의 원리다. 이 광막한 대우주는 무엇 때문에 벌여져 있고, 무엇을 위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둥글어 가는가? 우주의 존재목적은 무엇인가? 이 세상 인간의 문제는 과연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해결될 수 있다면 누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에 대해 그 누구도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떤 종교인도, 철인도, 현대의 첨단 과학자도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근본 문제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진리 틀을 깰 수 있는 공부가 천지이법을 공부하는 우주론(宇宙論) 공부다.
선천(先天) 봄여름에는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서 하늘과 땅의 관계가 삼천양지(三天兩地)로 되어 있다. 즉, 양(陽)인 하늘은 셋이고, 음(陰)인 땅은 둘이라고 하는 불균형 때문에 기울어진 지축을 중심으로 양기가 훨씬 강하게 작용한다. 이런 자연의 불균형 부조화, 음보다 양이 훨씬 강한 천지의 구조 속에서 상극(相克)의 운(運)이 조성된다. 원리적으로 상극의 현상을 이해를 할 때는 서로 상(相) 자 이길 극(克) 자, ‘두 사물 사이에 서로 극한다’는 의미로, 본래 뜻은 한쪽이 상대를 물리친다, 제압한다는 말이다. 순수한 자연의 봄여름의 법칙, 대자연의 이법으로서의 상극을 영어로는 조정한다, 제어한다는 의미인 뮤츄얼 리스트레인(mutual restrain)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
자연 속의 상극(相克)은 투쟁, 전쟁, 죽음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순수한 음양(陰陽)의 상극으로‘서로를 제어한다’는 의미다. 이 극克의 이치가,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균형되고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음과 양 상호간의 작용을 조정 제어하는 조화의 법칙이 된다. 이 상극의 이법적 환경속에서는 상극 기운의 영향을 받아 서로 경쟁하고, 전쟁을 하는 등 상호투쟁을 하게 된다. 문명 속에서 일어나는 이 때의 상극은 영어로 뮤츄얼 컨플릭트(mutual conflict)로 번역을 해야 맞다. 이렇게 자연의 상극과 문명의 상극이 의미가 다르다.
우리가 인간의 문명속에서 상극(相克)을 쓸 때는,‘정말로 극이 너무 많아’‘장애가 너무 많아’‘넘어서야 될 장벽이 너무 많아’라는 의미로 쓸 때는, 인간 세상에서 터져나오는 모든 비극과 수많은 재앙들, 자연재해, 하루도 쉬지 않고 터지는 교통사고, 수많은 인간들끼리의 분쟁과 같은 그러한 비극의 근원적 원인으로서 상극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순, 갈등, 죄악, 전쟁, 모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들이 여기에 다 들어간다.
이 자연의 상극과 문명의 상극 속에 서교의 원죄(原罪) 문제, 불가에서 말하는 인간의 무명(無明)과 업장의 문제가 다 들어간다. 선천문화권에서 인간론에 대해 언급한 숱한 문제들이‘상극의 이치가 인간과 만물을 맡았다’는 그 한마디 말씀으로 다 풀어지는 것이다. 상극의 이치’란 자연의 이법으로서 하늘땅이 만물을 다스리고 길러내는 생성, 창조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한 이 상극의 이치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길러내므로 인간의 역사, 문명속에서는 이 상극이 하루도 싸움 그칠 날 없는 비극적 세상을 만들었다.
선천은 상극의 이법이 인간역사속에서는 상쟁(相爭)이 돼서 피비린내 나는 상호투쟁, 대결, 생사를 판가름 짓는 전쟁, 전란으로 화해 천하를 원한으로 가득 채웠고, 어찌할 수 없는 상극의 자연이법, 상극의 운수로 인해 선천의 모든 인간과 만물은 원한을 맺고 사는 상극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相克의 天理가 人事로는 원한으로 맺히기 때문에, 인간역사의 뿌리깊은 원한의 갈등은 인간의 도덕적 교화만으로는 전혀 풀릴 수 없는 문제다. 선천 봄여름에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비극의 원인은 단순히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온 환경이 문제라는 것이다. 상극의 이치 때문에 조화와 균형이 깨져 있는 선천의 자연환경 자체가 비극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는 물, 마실 공기, 식량, 에너지 등이 부족하다. 언론에 공개된 미 국방부 비밀보고서를 보면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선천은 하늘과 땅과 인간과 신들의 세계조차 상극의 지배를 받으며 태어나고 살아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우주의 전 역사과정은 선천 우주의 봄여름천지가 만들어낸 하나의 연출이었다. 선천개벽으로 봄여름이 열려서 인간이 태어나 자라는 과정에서는 상극이 우주의 근본 질서가 되어 현실역사가 둥글어간다. 즉, 음과 양이 만물을 낳아 길러 분열하는 쪽으로 우주의 생명 질서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지구상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상극이 인간역사의 경쟁원리가 되어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를 계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꺼꾸러트려야만 했다. 이것이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종교전쟁의 역사를 보라. 얼마나 참혹한가. 거기에 무슨 神이 있고, 믿음이 있고, 정의가 있는가. 오직 독단과 죽음밖에 없다. 올바르게, 정의를 위해, 진리의 이름으로 행하려고 했으나 결국 서로 충돌하고 싸우고 죽였다. 여기서 세세연년 원과 한이 맺히고 쌓여온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천지 이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왜 고통 속에 사는가? 기독교에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다고 한다. 구렁이로 상징되는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하나님처럼 똑똑해지려고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대가로 세세토록 인간들이 원죄의 씨를 안고 고통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불교도 십이인연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감각세계에서 근본무지인 어둠에 휩싸여 있다고 한다.‘근본무명fundamental ignorance’에 휩싸여, 온갖 죄를 짓고 악업을 받고 육도윤회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그 근본 틀이 같다. 또 이 죄업이니, 악업이니, 윤회니, 하는 것이 선천의 상극 판에서는 어느 정도 맞는 얘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가 없다. 모든 인간의 고통과 불행과 비극의 문제는 어디서 오는 거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선천이 상극의 運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행 |
木: 유(儒) |
金: 불(佛) |
선(仙) |
水: 동선(東仙) |
火: 서선(西仙) |
도의 전공분야 |
유지범절(凡節) |
불지형체(形體) |
선지조화(仙之造化) |
우주 주재자 |
상제님 |
미륵 천주님 |
옥황 상제님 |
백보좌 하느님 |
목적(目的) |
대동(對同) |
극락(極樂) |
태청(泰淸) |
천국(天國) |
교리강령 |
충서(忠恕) 존심양성 (尊心養性) 집중관일 (執中貫一) |
자비(慈悲) 명심견성 (明心見性) 만법귀일 (萬法歸一) |
감음(感應) 수심연성 (修心練性) 포원수일 (抱元守一) |
박애(博愛) 성령감화 (聖靈感化) 삼계유일 (三界唯一) |
삼극 |
오황극 (五皇極) |
일태극(공) (一太極(空) |
십무극(十無極) |
(三位一體) |
무극/태극/황극 |
법신/보신/화신 |
옥청/상청/태청 |
성부/성자/성신 |
선천에는 천지부모의 몸이 동북방, 양의 방향으로 23.5도 기울어져서 만물을 쏟아냈다. 동과 서가 부조화하고, 남과 북이 부조화하고, 남자와 여자, 모든 사물들 사이에 조화가 깨져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고 갈등을 하고 남을 죽이고 그러면서도 또 용서하면서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을 해 온 것이다. 선천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요, 정복의 역사다. 16세기에 남미의 인디언들 8천만 명이 스페인 정복군들에 의해 참혹하게 죽어 인디언들이 거의 다 멸망을 당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런 전쟁사가 너무도 숱하다. 미국에 정착한 백인들이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흑인 5천만 명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먹고, 짐승처럼 부리고 학대하고 죽였다. 미국의 지성인 캔 윌버가 한 불교 승려에게 물었다. “중국의 불교 역사에서 깨진 자가 얼마나 됩니까?” 이에 대해 승려가 “크게 잡아도 천만 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캔 윌버가 다시 “그럼 일본 역사에서는 얼마나 됩니까?” 하자 “낫 모어 댄 어 더즌(Not more than a dozen).” 이라 했다. 기껏해야 한 여남은 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천종교 역사의 현주소다.
또한 진리의 세계는 이법(理法)의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진리의 세계도‘진리의 두 얼굴(two faces of truth)’있다. 우리 몸은 외면(outer side)과 내면(inner side), 곧 물리적인 몸(physical body)과 영적인 몸(spiritual body), 이렇게 둘로 구성되어 있다.‘진리의 이법, 법칙의 측면뿐만 아니라 인간이 배워서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신(神), 신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으로 깨닫고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성적·합리적인 측면과, 우리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사고·판단을 잘해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또 다른 얼굴, 神적인 측면이 진리의 두 얼굴이다. 결론적으로 진리란 이와 같이 합리적인 면과 비합리적인 면이 하나가 되어 구성된다.
진리는 리(principles)와 神(spirit), 이 둘이 하나가 되어 여기에서 인사(人事), 즉 사람의 일(human affairs)이 전개된다. 다시 말해서 이법과 神道를 바탕으로 인간 역사가 전개되는 것이다. 理는 사물의 조리, 하늘과 땅, 인간과 만물이 태어나고 변화해가는 길이며, 이것은 공부를 해서 이치로써 깨달으면 된다. 그러나 神의 세계는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치를 통해 神의 세계도 알게 되는 것이지만 단순히 공부만으로 합리적으로 따져서 아는 경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리를 하면, 진리의 세계 하나는 이해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체험의 세계다. 배움과 체험,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인간의 삶의 문제와 인간 역사의 문제, 즉 왜 세상은 이렇게 밖에 안 되는 것이냐, 왜 세상은 꼭 이런 과정을 거쳐서만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게 되느냐 하는, 마치 운명과도 같은 인간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 이치가 진리의 陽적인 면이라면, 神의 세계는 陰적인 면이다. 이것은 오직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수행(meditation)이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이 이성적, 합리적,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원리적인 면이 있고, 인간이 아무리 배우고 지식이 최상의 경계에 갈지라도 결코 알 수 없는 神적인 부분이 있다. 이 신의 세계를 모르면 인생은 한 마디로 까막눈이다. 절대로 인간이 뭔지, 진리가 뭔지 알 수 없고 자연의 섭리조차도 제대로 깨칠 수가 없다.
내 생명의 진액인 정(精)의 뿌리가 오장육부 중, 양쪽 신장(腎腸)이다. 이곳에서 기(氣)가 발동한다. 이를 신간동기(腎間動氣)라고 한다. 정(精)이란 남자의 정자,호르몬, 골수의 개념을 포괄하고, 여자의 경우도 똑같다. 오장육부, 두뇌, 세포하나, 뼈마디, 머리털 하나까지 모든것을 관장하는 것이 신장의 수(水)기, 정(精)이다.
정(精)이 충만해야 소화도 잘 되고, 잠도 푹 자고, 몸이 팽팽 잘 돌아간다. 병에도 안 걸린다. 하지만 정(精)이 파괴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천지의 사마(邪魔)가 날뛰고 온갖 병이 들어서 결국에는 단명하게 된다. 정(精)을 모으고 축적하고 순화해야 한다. 그래야 의기(意氣)가 강해진다.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정기(精氣)가 무너지면 지각문(知覺門)이 닫힌다. 수행은 성(性)과 명(命) 자체를 닦는 것이 아니라 우리몸의 정(精)을 관리하는 문제다. 정(精)을 근본으로 해서 닦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음란문화는 인간의 정(精)을 파괴하고 분열시킨다.
수행의 근본은 정(精)을 굳히고 맑히는 가의 문제로 떨어진다. 정(精)을 순화해야만 공부가 된다. 천지일월이 나를 만들어주고, 나에게 생명을 내주는 그 모든 열매가 정(精)이다. 정기를 잘 간직해야 여기서 힘도 나오고, 생명력도, 지혜도 나온다. 모든 것을 극복하는 힘의 원천이 정(精)이다. 수행을 통해서 본래의 성(性)과 명(命)이 하나였던 그 경계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 생명력이 우주와 더불어 하나인 영원의 경계, 그 자리는 무한의 광명 그 자체요, 성(性)과 명(命)이 하나인 상태다. 그럼 성(性)과 명(命)은 무엇이 다른가? 밝은 모습 자체는 성(性)이고, 그 모습이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것, 그것을 하나의 생명력으로 표현할 때 명(命)이라고 한다.
수행이 아니면 내 생명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 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수행은 내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이다. 유형의 정(精)과 무형의 마음(心)을 닦아 생명의 본래 자리로 들어서는 것이 바로 수행이다.
수행의 궁극은 생명의 본성인 성(性)과 명(命)을 회복하는 것이다. 생명(生命)의 원래 말이 성(性)과 명(命)이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내 생명의 밝은 모습(性),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생명력(命)을 회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나의 생명을 회복하는 과정, 이것이 우리들 삶의 목적이다.
인간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본래 모습, 성(性)과 명은 하늘땅과 같다. 어머니 뱃속에서 천지와 더불어 호흡할 때는 성(性)과 명(命)이 하나이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 탯줄을 끊는 순간 인간적인 호흡을 시작하게 되고, 본래 우주와 하나인 성(性)과 명(命)이 분리된다. 눈을 뜨고도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적인 어둠에 휩싸여 그 이면의 세계를 전혀 못 보게 된다. 우주를 비추고도 남을 만큼 밝은 내 생명의 본래 모습, 내 마음의 근원인 성(性)이 후천적인 성(性)으로 바뀌면서 어둠의 세계로 떨어진다.
또한 하늘같은 무한의 생명력인 내 명(命)이 불과 몇 십 년 살다가 병들어 죽는 유한의 명(命) 자리로 떨어진다. 온갖 인생의 시련과 역경, 고난의 파도를 만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다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함으로써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있던 본래의 성(性)과 명(命)을 회복한다. 천지와 같은 내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내 생명의 기반인 성명정(性命精) 세 요소를 닦는 것이다.
수행을 하려고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안식眼識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또 몇 미터 이상만 떨어져 있어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냄새도 일정한 거리 이상이 되면 맡지 못한다. 이것이 보통 세속 중생들의 몸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되면서, 내 몸의 혼탁한 기운이 순수음양의 율려로 정화된다. 그렇게 되면, 눈을 감아도 새로운 차원의 경계가 환히 보이기 시작한다. 또 깊은 밤 수행을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귀에서 뚝 소리가 난다. 귓밥이 스스로 파헤쳐져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 먼 곳에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내 의식의 경계가 천지의 대생명과 하나가 되어, 내 생명이 온 천지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체득하게 되는 경계가 있다. 정신이 확 깨져서 수도를 잘 하면, 어느 순간 내 몸이 없어진다. 내 몸뚱아리가 온 우주 생명 자체라는 열려있는 의식의 경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첫 경험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된다. 수도修道의 궁극의 목적은 세속적인 말로 도통道通이다. 불교의 도법은, 오로지 견성見性을 하려고, 부모형제도 세상도 다 등진다. 도통을 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수행이란 자기가 자기 심법을 연마하는 것이다. 명칭이야 참선이라 하든, 수도, 수련이라고 하든, 뭐라고 명명하든지 간에 다 一心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직 일심으로써만 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이 神의 세계를 모르면 짐승처럼 살게 된다.‘신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이지. 세상은 그냥 즐기는 거야. 젊었을 때 열심히 벌어서 써야지, 늙어지면 못 노나니 젊어서 노세.’그런 인생으로 간다. 이법은 합리적으로 깨치는 것, 이성적인 것이지만 신의 세계는 합리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왜냐하면, 영적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밤에 잠을 자는데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났다거나, 또는 죽은 남편을 만났다거나 죽은 어린 자식을 만났다. 그래서 한창 놀고 있는데 누가 와서 소리를 질러 확 깼다? 그럴 경우‘내 영이 실제로 그들을 만난 거다’그리고 돌아올 때는 1, 2초, 2, 3초 만에 돌아온다. 시공을 초월해버리는 것이다. 영적 세계는 그런 세계다. 신의 세계는 직접 체험을 해서 내 영적인 눈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진리를 들을 줄 알고, 온몸으로 느낄 줄 알고, 영적으로 볼 줄 아는 순수 감성이 있어야 된다.
진리의 3박자 理-神-事에서 사(事)는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 엮어 나가는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을 말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주의 이법, 자연 이법만을 바탕으로 역사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만물은 무형과 유형, 즉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음양일체가 되어 한 생명체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 역사는 천지 이법의 지배만 받는 게 아니라‘신이 개입해야’현실로 전개되는 것이다. 물론 이 신神은 자연의 이법을 완전 초월해서 독존(獨存)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 합리적인 세계, 수학적인 세계인 천지 이법과 이를 초월한, 시공을 초월한 신의 세계, 이 두 얼굴이 합해져야 진리의 기본 틀이 구성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이 천지의 꿈을 이뤄나가는 총체적인 과정이 바로 역사다. 이 理-神-事가운데 진리의 열매, 진리의 현실적인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人事, 사람일, 다른 말로 역사를 아는 게 가장 어렵다.
천지의 이법에는 틈새가 없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한 번도 어기질 않는다.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게 진리(眞理)다. 진리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저녁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깊으면 또 새벽이 온다. 그리고 인간이 태어나 살다가 죽으면 영적인 존재, 신명으로 태어난다. 지나간 인류역사의 모든 삶의 과정이 다 여기에 축적돼 있다. 그래서 어렵기는 하지만 역사 공부가 가장 재미있으며, 역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가장 성숙된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역사의 틀, 역사의 대세를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불가에서는 내 생명이 태어나고, 나아가 전 우주가 일어난 생명의 근원자리에 대해‘일심경계’로 말한다. 그런데‘일심경계’를 잘못 이해하면, 자기 자신을 백번 천번 죽음의 사념에 빠뜨리게 된다.
‘일심경계’란 이 대우주 생명이 하나가 되어 둥글어가는 의식의 근원 경계를 말한다. 그 일심(一心), 한마음이란 대우주만물과 내 생명이 하나 되는 생명의 순수의식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못 이해하여 지나치게 독선적인 주관적 유심론唯心論 같은 데 빠져버리면,‘모든 건 그냥 마음에서 일어나서 마음으로 끝난다. 마음만 깨면 다 된다.’이렇게 알게 된다.
천지만물이 태어나고 변화해 나가는 천리, 대자연의 변화섭리인 기본 이법은 모르고, 단순히 그 본원자리, 생명의 의식경계만 갖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 진리의 구성은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몇 년 전 영국에 갔을 때, 지구촌의 생명, 마음, 건강, 미래의학 또는 동서양 종교 분야의 가르침을 취급하는 전문서점인 왓킨슨(Watkinson) 서점엘 간 적이 있다. 진열대를 쭉 둘러보다가 끝내주는 제목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Mind is not all!』, 즉‘마음만이 다가 아니다!’한마디로 뒤통수를 때리는 제목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안 닦으면 죽고, 마음을 안 닦으면 영원히 윤회하고, 마음을 안 닦으면 인간에게 희망이 없다고 한다. 이것도 물론 절실하고 근본이 되는 주제로서 때에 따라서는 부분적으로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우주의 질서가 바뀌는 시간대에서는 그것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Mind is not all! 마음만이 다가 아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문화시대, 바이오 소사이어티(Bio Society)가 다가온다.
사람 인체 구조라 하는 것은 水火로 되어져 있다. 사람은 물기운과 불기운, 두 가지 기운을 가지고 산다. 사람의 콩팥이 양쪽으로 하나씩 붙어 있는데 하나는 물(水)을 맡고 있고, 하나는 불(火)을 맡고 있다. 그런데 본래 물水은 밑으로 내려가려 하고 불火기운은 올라가려는 성질이 있다. 水火의 성질이 그렇다. 그렇건만 시간적으로 앉아서 수도를 하다 보면 수승화강水昇火降이 되면서 水氣가 척추를 통해 올라온다. 그러면서 이 얼굴에서 만의회집지상(萬蟻會集之像)이 일어난다.
만의회집지상이란 일만 마리의 개미가 모여드는 현상을 말한다. 만의회집지상이 되면 개미가 얼굴에 기어다니는 것처럼 섬섬대서 못 배긴다. 그런데 이건 피부 밖에서 그러는 게 아니고 피부 속에서, 살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가려워서 도저히 못 배긴다. 그게 바로 水氣가 순환循環하느라고 그런 것이다. 만의회집지상은 아주 미세한 세포에까지 수기가 올라오면서 기혈이 작용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몸의 수분은 氣가 끌고 다닌다.
氣가 생동해서 수분을 끌고 와 水氣가 상승하는데, 그게 얼마 지나면 완전히 수승화강이 돼서 체질 개선이 된다. 그 경지에 가면 그런 현상이 다 없어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아주 피부도 말쑥해지고, 눈도 유리알보다 더 반질반질하니 광채가 난다. 수도하는 사람은 눈을 보면 안다. 또 한편으로는 인당印堂이 얼음을 갖다 얹은 것 모양 시원하다.
또 백회 부분을 정문頂門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서 아주 맑은 기운이 뻗쳐오른다. 정문은 또 삼리三離라고도 하고,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그 이 자가 이방離方 이 자인데, 남쪽을 뜻한다. 턱 아래쪽이 북쪽이고, 위쪽이 남쪽이다. 기운은 정문頂門을 통해 내려온다. 그래서 정문을 쥐구멍이라고도 하는데, 수련을 하면 이 쥐구멍으로 기운이 오르고 내리는 걸 느낀다. 심령으로 통을 하고 육체적으로 수승화강이 돼서 체질이 완전히 변화되면, 청명한 맑은 기운이 하늘까지 꽨다. 체질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변화한다. 그런데 무형인 정신은‘망형망재(忘形忘在)’가 된다. 자연하고 내가 합치되어 하나가 돼 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광명(光明)이 어느 정도까지 열리게 되느냐 하면, 1년 중 가장 밝을 때가 가을인데, 말쑥한 가을하늘처럼 환하다.
저 십 리 밖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솔잎 갉아먹는 것까지 환하게 보인다. 그렇게까지 광명이 열린다. 그러면서 자꾸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다른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까지 간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기혈이 순환하는 데 따라서 신체의 온도가 40도 이상이 되기도 한다. 그 때 손으로 살을 대면 껍데기가 벗겨져 버린다. 그런 경계를 넘어서면 수행공부가 금방 된다. 그런데 수도 공부를 하려고 보면, 쉽게 얘기해서 무슨 마魔라고나 할까, 그런 게 자꾸 낀다.
간혹 수행공부하는 사람들 중엔 공부도 못 하고, 입 삐뚤어지고 눈 삐뚤어지는 구안와사口眼喎斜 같은 병도 걸리는 사람이 있다. 또 수도라는 걸 잘못하면 귀신한테 홀려서.”살살 꾀어내면 그냥 넘어가 사도邪道, 곁길로 빠지는 사람도 그렇게 많다. 한 백 명 공부하면 90% 이상은 곁길로 빠져 버린다. 그게 왜 그러느냐? 세간에 사람 뚜겁을 쓰고 나온 사람 쳐놓고 원억을 맺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원한 맺힌 신명들이 원한을 풀지못해서, 무슨 코만 있으면 달려붙어 삐꾸럭길로 끌고 가는 것이다.
하나 예를 들어 과거에 일주일을 한도로 해서 수련공부를 하는데 한 닷새쯤 되어서 박선경이라는 사람이 공부하다 말고“왁!”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뒤로 나자빠진다. 그러니 여러 사람이“왜 그랬냐?”하고 물으니 이런 얘기를 한다. 그의 큰아버지 얘기다. 강원도 산골짝에 갈 것 같으면 나무뙈기로 얽은 삽짝문(사립문)이 있어서 밤에는 그냥 지쳐두고 낮에는 열어 놓는다. 그게 문 닫고 여는 것이다. 거기는 도적도 없다.
하루는 그 큰아버지가 볼일을 본다고 어디를 갔다. 그 일정이 거리로도 그렇고 한 사흘 걸려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게 됐다. 그런데 그날은 얼마 가다가 아는 사람도 만나고 해서 술 몇 잔 먹다가 시간이 없어서 못 가고, 얼큰하게 술에 취해서 밤중에 집으로 들어왔다.
그가 제 집에 돌아와 보니까 토방에 자기 마누라 신발하고 알 만한 동네 사람의 신발이 나란히 있다. 그걸보고 그 사람이 눈이 뒤집어져 버렸다. 그래서 욱 하는 생각에 헛간으로 달려가 도끼를 들고 연놈을 찍어 죽인다고 뛰어 들어갔다. 하니까 벌써 그 마누라는 뒷문으로 도망가고 동네 사람만 그 도끼에 찍혀 죽어 버렸다. 이유야 어떻든지 그의 큰아버지는 사람을 죽였으니 철창엘 갔다. 그런 사실이 있었는데, 그때 박선경이 도통을 하려고 하니까 그 죽은 신명이 도끼를 가지고 찍으러 달려붙더라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가 유부녀 보다가 도끼 맞아죽었으니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다. 제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죽었기 때문에 복수를 하려고 한다. 신명세상도 그렇고 인간 세상도 저 잘못한 것은 전혀 생각을 안 한다. 그런 것이 척(隻)이다. 여러 백 대 내려오면서 그런 크고 작은 척신들이 달려붙어서 보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또하나 예를 들어서, 인간세상에서는 다시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런 미인이, 옥 같은 것으로 만든 좋은 술상을 차려놓고, 빵긋빵긋 웃으면서 한 잔 대접한다고 했다고, 그런 좋은 걸 봤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게 보이냐 하면, 그가 본래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 자세가 그렇게 되어져 있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그가 신명에게 코를 내준 것이다. 사람이나 속지 신명은 속지않는다. 신명神明은 인간의 정신을 다 들여다보고 있다. 신명이 보니까 고놈 정신이 꼭 그렇게 되어져 있더란 말이다.
한 일주일을 한도로 해서 수련을 시켜보면, 어지간하면 사흘이면 다 개안開眼이 된다. 열 개開 자 눈 안眼 자, 개안은 神明세계를 보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 선조들은 그걸‘개안開眼’이라고 한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유체이탈하여 어느 누구의 가정도 찾아갈 수 있다. 개안이라 하는 것이 도통하는 첫 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