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후문은 코흘리개의 용돈을 겨냥하고 좌판을 벌여놓은 온갖 야바위꾼과 잡상인들로 북적였다. 나무로 만든 뱀과 개구리 장난감, 큰 함석대야에서 벌어지는 물방개 경주, 얼기설기 대못 사이를 통과해 경품을 타는 구슬게임, 긴끈과 작은 끈을 찾아내는 복불복, 어지럽게 섞은 작은 컵 속에 숨은 주사위 찾기, 널판지 오목게임. 그래도 아마 변함없이 인기를 끄는 것은 먹거리였을게다. 지금에 와서 복고의 열풍을 타고 추억의 불량식품(?)으로 각광받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발로 구르는 물레에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솜사탕, 연탄불에 구워주는 쫀드기, 침으로 녹여가며 열심을 다하던 달고나 뽑기, 쇠로 만든 틀위에 뜨거운 설탕물을 부어 만드는 용, 호랑이, 토끼, 오리 그리고 팥이 터져나온 붕어빵, 불어 터진 어묵, 떡볶이. 그중에서도 으뜸은 전봇대에 기댄 자전거에서 회전 뽑기판을 돌려 맞추면 신문지로 돌돌말아 만든 고깔에 국물과 함께 담아주던 번데기가 아니었을까. 우린 언제나 중독성이 강한 구수한 냄새와 짭쪼름하고 쫀듯하게 씹히는 그 맛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오랜 시절을 따뜻한 시선 한번 받지 못하다가 번데기처럼 인고(忍苦)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화려한 나비가 된 와인이 있다. 피노 그리스(Pinot Gris)다. 화이트 와인 애호가들이 늘상 마시던 것에서 작은 일탈을 원할 때 피노 그리스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언제나 놀라운 상쾌함을 선사한다는 것이 그들의 찬사이며 결국 열렬한 광팬이 되고 만다.
Wine NZ의 통계에 의하면 2013년 2월 현재 뉴질랜드에는 4백만 리터 이상의 와인을 판매하는 상업화된 와인어리 15개를 포함해서 692개의 와인어리가 있다. 하지만 609개의 와인어리는 20만 리터를 넘지 않는 자그마한 와인어리들이다. 또한 뉴질랜드 전체 생산량의 4분의 3이 화이트 와인이고 나머지가 레드와인이다. 소비뇽 블랑이 전체 생산량의 58%로 가장많고 다음이 피노 누아로 15%, 샤도네이 9%, 피노 그리스 7%, 멜로 4%, 리슬링 2%, 쉬라가 1% 다.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노 그리스는 꾸준히 성장을 해왔고 그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2002년에 겨우 232헥타에서 재배되던 것이 2012년엔 1764헥타로 10년만에 거의 8배에 가까운 성장을 보여준다. 피노 그리스는 40% 정도가 말보로에서 재배되며 혹스베이 20%, 기스본이 14%로 그 뒤를 잇는다. 다음으로는 센트럴 오타고 10%, 와이파라와 넬슨지역이 각각 6%로 그 생산량이 서서히 늘고 있다.
뉴질랜드의 피노 그리스는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와인과 많이 닮아 있으며 이탈리아의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 보다는 드라이하다. 주로 사과와 배, 자두 그리고 꿀향을 담고 있는 피노 그리스는 따뜻한 지방은 잘 익고 풍부한 과일향과 함께 풀바디이면서도 목넘김이 매끄럽고 추운 지방의 경우 더욱 견고한 조직감을 지니면서 산도가 높고 상큼한 와인의 캐릭터를 가지게 된다.
유명한 생물학자 찰스 코언 박사는 나비의 아름다움에 빠져 나비연구에만 평생을 바쳤다. 그는 뚱뚱한 몸집의 번데기로부터 작은 구멍을 비집고 나오며 변태(變態)의 과정을 겪는 나비의 고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번데기의 구멍을 가위로 잘라 주었다. 나비들은 넓은 구멍으로 태어나 쉽게 세상을 맛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날지 못하고 땅위에서 힘없이 뒹굴었다. 색채 역시 자연 탈바꿈한 나비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날지 못하는 나비는 더 이상 나비가 아니다.’이 나비연구는 어려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나비는 변태과정을 통해 얼마나 애를 써서 어려움을 이겨내고 세상에 태어 났느냐에 따라 더 우아하게 날 수 있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생존을 결정짓기도 한다. 결국 번데기의 바늘귀 만한 구멍이 나비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다. 화려한 세상으로의 비상(飛上)을 꿈꾸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우리들처럼 말이다. 날기를 간절히 원할 때에만 애벌레는 푸른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