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실(過失)–음식을 먹다가 나온 이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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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2012. 17:13
이동온 (222.♡.243.40)
뉴질랜드 법률정보
어느 늦은 일요일 오후, 운전을 하다가 새로 생긴 피자 체인점을 보고 생뚱맞게 십여 년 전 신문기사가 생각 났다.
모 피자 체인점에서 치즈 피자 등 채식주의자를 위한 피자를 샀는데, 먹다 보니 피자에 돼지고기로 만들어진 베이컨이 들어 있었고, 미처 발견을 하지 못해 삼켜버린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독실한 이슬람 교도로, 모처럼 가족들과 피자를 먹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었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살아 있는 돼지는 물론 돼지 고기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는 이 가족은 돼지고기를 먹는 중대한 죄를 지었다며, 이슬람교 성지인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 가서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며, 피자 회사 측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슬람교의 교리를 알지 못하니,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 수는 없으나, 대부분의 뉴질랜드 사람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피자 회사 측은 정중한 사과와 함께 무료로 피자를 제공 하겠다고 제안 하였으나, 이 ‘피해자’들은 꼭 메카에 가야만 한다며 완강히 버티었고, 결국 뉴질랜드 이슬람 협회의 권고 하에 원만히 해결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의 생뚱맞은 회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린 시절 본 한국 드라마로 이어졌다. ‘한지붕 세가족’이라는 일요 드라마로 기억하는데, 한 아주머니가 이웃이 준 캔 음료를 마시다가 이물질을 발견했고, 그 회사에 항의 전화를 했더니 회사에서 사건을 무마 하려고 온갖 선물을 가지고 찾아 오는데, 이 선물을 가지고 이웃들이 다툰다는 줄거리였다. 실제로 음료를 마시고 이물질을 발견한 ‘피해자’ 앞으로 배달 온 선물을 집주인이 가로채려 하기도 하고, 애초에 음료를 준 사람이 자기 몫을 챙기려 하고. 결국엔 피해자가 모든 선물을 증거자료로 소비자 보호 센터에 고발한다는 결론이었다.
Tort라 불리는 현대 영미법에는 negligence라는 분야가 있다. 한국식으로는 불법행위를 통한 과실(過失) 정도로 번역이 될 듯 한데, 과실책임 관련 법은 이십 세기 초반 영국 판례인 Donoghue v Stevenson을 통해 정립 되었다. 혹자에 따르면 이 판례는 영국 변호사들이 불문법(不文法)에 기여한 가장 큰 업적이라 하는데, 이 판례가 나오게 된 사건이 참 재미있다.
도노휴라는 아주머니는 어느 날 친구랑 같이 카페에 갔는데, 친구가 진저비어 라는 음료를 사주게 된다. 도노휴 아주머니는 진저비어를 병 채로 마시기 보다는 조금씩 유리잔에 따라 마시고 있었는데, 한참을 마시고 다시 잔을 채우다 보니 진저비어 속에 부식되고 있던 달팽이가 나온 것이었다. 도노휴 아주머니는 그 것을 보고 큰 쇼크에 빠지게 되고 또한 장염 진단을 받게 된다. 이를 근거로 진저비어의 제작자인 스티븐슨씨를 상대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 소송의 판결이 현대 과실 관련 법의 근간이 되고 있다.
불법행위법(tort) 상의 과실을 주장 하려면 피해자는 여러 사항을 입증 하여야 하는데, 먼저 가해자가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어떤 ‘의무’가 존재해야 하고, 가해자가 이 의무를 소홀히 하였기에 실제로 피해자가 손실을 입었음을 입증 하여야 한다. 도노휴 아주머니의 사건 전까지만 해도, 물품의 제조자가 소비자에게 어떤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긴 어려웠으나, 이 판결을 기점으로 제조업자는 제조된 물품을 사용하게 될 소비자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을 의무가 있다는 원칙이 만들어지게 된다.
과실로 인해 입은 상해에 대한 소송은 뉴질랜드를 제외한 영미법 국가에서는 생각보다 흔한데, 뉴질랜드에서는 흔히 ACC라 불리는 accident compensation scheme으로 인해 과실로 인한 인체 상해는 소송을 제기할 수 없게 되어있다. 위에서 언급한 피자 사건에서 불 수 있듯이, 음식을 먹다가 나온 이물질로 인해 신체적 (또는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할지라도, 딱히 민사상의 책임을 추궁하기 보다는 ACC를 통한 보상을 알아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