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9988ㆍ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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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잘쓰면 좋지만 잘못쓰면 남에게 혐오감을 주는게 향수(香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아우님 내가 향수를 좀 썼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너무 진한 향수냄새 때문에 곁에서 머리가 아팠던 적잖은 경험 때문에 조심스럽게 함께 차를 탄 자매님에게 묻는다. “괜찮으세요.”솔직한 분이라 그 말을 그대로 믿기로 한다. 해보지 않던 일을 하면 왜 그리 쑥스러운지 멋적고 편치가 않아 던져 본 말이기도 하다.

처녀 때엔 싱그러운 살냄새가 자신있어 향수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중년에는 퍼머 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오직 자연주의 남편 때문에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 그러나 평범한 가정주부가 향수 뿌리고 딱히 외출할만한 곳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이제 입냄새 몸냄새가 날 수 있으니 향수를 쓰도록 하라는 말이 계노록에도 담겨 있어 사용해본 향수인데…….

칠십에 고려장 지내던 시대도 있었건만 이젠 장수하는 세태가 늙은사람 수칙으로 계노록(戒老錄)이라는 것도 있어 공감하면서 수용하기로 한다. 살만큼 살았다고 되는대로 살지말고 제대로 살면서 사람대우 어른대우 받으며 여생을 질서속에서 살라는 지침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이 백 이십이라던가, 과학문명의 시대가 거기에 도전하도록 유도하는 것인지 요즈음은 심심치 않게 백수를 누리는 사람들을 본다. 얼마전에 클라프트 센터에서는 백 두살의 건강한 할머니의 생일파티가 있었다고 들었다. 팔순이 넘은 ㅇㅇㅇ형님이 네살 연상의 키위할아버지와 떡 벌어지는 결혼식을 하고 알콩달콩 신혼가정을 꾸며 백수에 도전하신 일도 있질 않은가. 백살까지 사시라고 자손들이 만들어 준 효도의 배려란다.

한참 전의 일이다. 어느 모임에선가 축배를 들면서 부라보 대신으로 9988, 1234를 선창하시는 어른을 따라 모두가 함께 그렇게 소리치며 그 뜻이 몹시 궁금했다.

“아흔아홉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일어날 수 없을 땐 삼, 사일만 버티다가 죽자”란다. 아흔아홉까지 살려면 여기저기 고장나고 지루할 것 같은데 그래도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일어날 수 없을 땐 단박에 죽어야지 삼, 사일 버티는 것도 길다는 말 뿐이다.

개똥밭에 딩굴어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듯이 한 번 뿐인 삶을 빨리 끝내고 싶은 사람은 없는게 사실이다. 오늘날 끊임없는 의학의 연구발달도 궁극적으로는 건강하게 오래 살자는 목적이 아니던가. 때 맞춰 계노록이란 것도 필독할 가치가 있고 노력도 있어야만 장수시대에 걸맞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같다.

일손을 놓고 사회에서 소외 된 삶을 어떻게 외롭지 않게 보낼 것이며 자식들과의 융화도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잘이루어내야 옳게 편하게 살게 되는지……, 9988 1234는 외치는 것만이 중요한게 아니고 그것을 실행해 나가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낡아가는 기계 덜커덩거리며 고장나려 덤비는걸 어찌 막으리. 이물질을 입속에 넣고 마냥 둔해진 미각에 전에 먹던 애호박 칼국수를 아무리 선호해도 지금은 그 맛을 찾아 낼 수가 없다. 요즈음같이 씻고 닦는데 편리한 문화공간에서 살아도 화장품 냄새까지 먹어 치우는 기분 좋지 않은 방냄새도 그게 바로 내 몸냄새여서 늙음은 어떻게도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옛날에 시골에 내려가면 노인들이 쓰는 사랑방의 역겨운 냄새에 코를 막고 찡그렸던 어렸을적 생각이 떠오른다. 담배냄새에 찌들은 누렇게 얼룩진 벽지와 자주 씻지 못하는 추한 냄새려니했는데….

이제 향수뿐만이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 과감히 투자를 하고 신경써서 정성으로 여생을 살기로 노력해야겠다. 사실 이제야말로 자식들에게서 놓여 나 최고의 인생을 누릴 가치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접어 두었던 이상의 날개를 활짝펴고 비상할 때가 오히려 지금인것 같은데 젊은이들은 그리 생각 안 하는게 문제다.

“얼마나 더 살 꺼라고 그런걸 해”“왜 새것을 살까?”

제것 뺏어 쓰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것을 써도 못마땅해 하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 것은 모두 내 것으로 생각하고 축내는 것이 싫다는 뜻인데 그들도 늙어보면 이해하리라.

인생에 있어서 임시라는것, 대충이란 말은 있을 수가 없다. 오늘은 평생에 딱 한 번만 맞는 날이기에 가버리면 끝이다. 추수가 끝난 빈 들에는 쓸쓸하지만 내년을 준비하는 과정이 또 있다. 허지만 인생은 낭떨어지를 향해 가고 있으니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새빨간 옷으로 곱게 정장하고 나드리 나가는 이 나라 노인들 모습이 아름다워 공감을 하게 된다. 까페에서 노부부가 정답게 담소하는 모습도, 공원을 천천히 손잡고 산책하는 그림도 자주 만나는 풍경인데 우리네 정서와는 퍽 다르게 느껴진다. 평생을 함께한 부부가 아름다운 황혼을 즐기는 멋진 모습임에 부럽다. 9988 1234 나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고 먼먼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니 웬 일일까?

이 원고를 탈고하려는 순간 내게 뜻하지 않은 부음이 전해져 왔다. 아직 육십도 안된 6ㆍ25 사변둥이 막내동생이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다. 그는 9988…… 도 몰랐었나? 어찌 그리 서둘러 떠났을까? 슬픈 일이다. 동생의 명복을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