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솔잎 향기 그윽한 추석을 맞다

[317] 솔잎 향기 그윽한 추석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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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몹씨 사납던 지난 주말,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다. 그 바람 속에서 악전고투로 공을 날려야만 하는 막힌 데 없는 골프장. 거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럭저럭 마무리를 짓고 나오려는데 같이 치던 K가 혼자서 우물쭈물 처지려고 하는 눈치다. 알고보니 사람 보이지 않은 곳으로 가서 솔잎을 따가겠다는 의도였다.(그렇지 송편을 하겠다는 거로구나)

  문득 추석명절을 떠올리는 주부의 바쁜 마음으로 정서가 꿈틀거렸다. 나도 가방에 챙겨 두었던 비상용의 비닐백을 찾아 꺼내 들고 아득히 하늘 끝까지 뻗어 나간 우람한 소나무 밑으로 닥아섰다. 바람에 춤을 추듯 심하게 출렁거리는 가지 하나를 붙잡고 솔잎을 정신없이 뽑아 담았다. 한 번도 해본적 없는 일이다. 장보기의 한몫으로 부지런한 손길로 누군가가 시장에 내다 놓은 풋풋한 솔 몇웅큼 사서 들고 오면 그게 송편 빚기의 시작이었는데…,

  느닷없이 송편을 빚겠다는 묘한 분위기에 쌓이면서 먼 옛날도 잊혀져간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가벼운 흥분으로 설레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주부가 되고 단촐한 가족들을 위해 혼자 쭈구려 앉아서 빚던 그때보다 어렸을 때 어머니 곁에 둘러 앉아서 고사리 손으로 오물조물 주물러 어른 흉내내며 만들어 내던 그 때의 추억이 더 진하게 떠오른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어야 이 다음에 시집가서 예쁜 딸을 낳는다는 엄마 말에 정성들여 예쁘게 만들다가도 나중에는 싫증이 나서 나름대로 동물모양도 만들어 보고 했던 생각이 난다. 밑에 깔려 모양이 변할까봐 손에 들고 있다가 시루 맨 마지막 위에 살짝 올려 놓아야 직성이 풀리던 호기심 많던 소녀, “그게 어디 송편이냐?” 언니한테 지천구를 들어도 그게 재미있는 추석놀이 같았다.

  좀 더 커서는 송편 만들기에 동참하기도 어려웠다. 큰 소쿠리에 소담스럽게 쪄서 장독대에 내어 놓은 참기름 냄새 폴폴 풍기는 송편을 집에 오자마자 콩줏어 먹듯 먹어대기에만 바빴다. 허리 구부리고 온종일 어머니 혼자 빚어 만든 정성의 떡을 정신없이 축을 내도 그게 흐뭇하기만 하시던 어머니.

  오늘날의 여인들은 정말로 너무나 편하게 사는 세상 아닌가. 솔을 뜯었으니 이젠 쌀가루를 사야지. 한국식품으로 차를 몰아간다. 냉장고 안에 얌전히 자리잡고 앉은 쌀가루 한봉지, 중국산인지 태국산인지 노랗게 거피해놓은 반쪽짜리 녹두 한 봉지, 시장바닥에 파랗게 때깔 고운 풋콩이 눈앞에 어른거리지만 계절조차 가을이 아닌 벗꽃 창창한 봄이고 보니 햇곡이 있을리가 없질 않은가. 아쉬운대로 흉내라도 내고 살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여기가 어디인가. 집에 돌아와 솔잎을 얌전하게 다듬어서 깨끗이 씻어 놓았다. 밖으로만 돌아치던 남자같은 내가 쭈구려 앉아서 얌전한 주부가 되려니 벌써부터 허리가 꼬이고 아플게 겁이 난다. 허지만 솔잎냄새 향그러운 맛있고 쫄깃한 송편을 먹어보게 된다는 기대가 만만치 않게 겁을 누른다.(어디 내일 두고 보자)

  체대신 얼레미에 곱게 쌀가루를 내리고 폿트에 물을 끓여 따끈따끈한 익반죽을 한다. 바가지가 끓는 물에 송글송글 할 때 그 물로 반죽을 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시대가 변해서 폿트에 물을 끓여 직접 따라 쓰니 너무 좋다. 팔에 힘을 넣어 반죽을 치대고 비닐봉지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놓고 속고물을 준비한다. 냉장고도 비닐봉지도 없던 시절 적신 면보자기에 싸서 놓은 반죽이 자꾸만 말라서 보자기 적셔 덮어 놓는 일도 번거롭기만 했다. 쭈구려 앉아서 허리 아플 걱정도 해결이 되었다. 탁자에 모든 걸 준비해놓고 소파에 앉아 송편을 빚는 신식법이라고나 할까. 옛날 생각을 하면서 솜씨를 내본다.

  “입을 꼭꼭 아물러 놔야 터지지가 않아. 그리고 양귀는 뽀족하게 날이 서야지. 오죽하면 송편 귀로 멱을 딴다고 하지 않든……”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뻥도 너무 심하다 싶어 피~ 하고 입을 내밀던 어렸을적. 어머니도 어른들한테 들은 말이리라. 아뭏튼 통통하게 배가 나오고 양귀가 야무지게 날이 선 어머니의 송편은 그냥 먹어 치우기엔 아깝다는 생각을 늘상 했었다. 그렇게 예쁘게 흉내내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은 내 솜씨가 부족해서 임을 어쩌리. 처음엔 자그마하게 예쁘던게 나중에는 실증이 나서 점점 커지는게 보통이다. 이번에는 크게 시작해서 점점 작고 예쁜 솜씨가 살아났다. 아이구 다행스러워라. 치매는 아직 안 걸리겠군.

  시루 아닌 찜통에서 솟아 나오는 솔잎향기. 그것도 한국 솔잎만큼은 산뜻하고 강하지가 않아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보자기에 찌는 송편 같으랴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송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을, 많지 않은 것 물에 씻을 것도 없다. 솔잎 뜯어내고 바로 참기름 발라내니 아~ 바로 이 맛이야. 쫀득쫀득한 떡 속에서 씹히는 달지 않고 구수한 녹두의 맛, 익반죽의 독특한 씹힘이며 솔잎으로 찌는 송편의 진짜 맛이 이런 것이다.

  오랜만에 만들어 주는 엄마의 송편에 애들이 감동받았으면 좋겠다. 엊그제 저이들끼리 했다던 풋콩 넣은 송편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건 아니지만 송편은 송편. 이 엄마의 송편을 한국의 아이한테는 어이 보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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