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 반근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정동희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이현숙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멜리사 리
수필기행
조기조
김지향
송하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Mira Kim
EduExperts
김도형
Timothy Cho
김수동
최성길
크리스티나 리
박종배
새움터
동진
이동온
피터 황
이현숙
변상호경관
마리리
마이클 킴
조병철
정윤성
김영나
여실지
Jessica Phuang
정상화
휴람
송영림
월드비전
독자기고
이신

돼지고기 반근

red4806
0 개 1,349 수필기행

대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날 밤이었다. 어두운 얼굴로 나가신 아버지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발자국 소리가 우리 집 대문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소금이 물에 녹아 내리듯 내 몸도 슬픔에 조금씩 녹아내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귀 두 개뿐인 듯했다.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했던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없었다. 눈이 먼저 보고 머리로 연락을 취한 그 순간, ‘아’ 하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게시판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누군가 뒤에서 밀며 머리를 좀 치우라고 했다. 시험에 떨어진 사람의 머리는 뒤에서 봐도 눈에 영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골목으로 접어든 바람은 모두 우리 집 대문을 흔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섣달 바람이 지루한 겨울 밤을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이려니 하고 생각하자 다소 마음이 누그러졌다. 대문에 걸어둔 우편함도 덜컹대고 있었다. 자랑스런 대학합격통지서를 담게 되리라는 제 예상이 빗나가서 제 딴에도 꽤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이젠 낡아서 틈새가 벌어진 대문 두 짝이 계속 삐거덕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쇠로 된 문고리가 철판에 부딪히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내 속에서 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바람에 채이고 멱살을 잡히면서도 대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맨 앞에 서서 고스란히 비바람을 맞고 있는 대문, 자신이 보듬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참고 있는 대문을 보면, 나는 늘 아버지가 연상되었다.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는 두 가지였다. 술을 드시지 않았을 때는 군인 출신답게 무게가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아주 규칙적인데 비해, 술을 드시고 오는 날의 발자국 소리는 구두 밑창이 바닥에 조금 끌리면서 장단이 좀처럼 맞지 않는 엇박자 였다.  


간간이 발자국 소리가 끊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때 골목 중간쯤에 있는 전봇대나 담벼락을 붙잡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을지도 모른다. 희망이라는 것들은 죄다 하늘로 올려가서 이제는 따오지도 못할 별이 되고 말았다는 아버지의 푸념소리가 골목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내 귀는 더 밝아졌다. 옆에서 잠든 동생들은 내 낙방소식을 잊었는지 편안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고, 안방에 계신 어머니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차라리 고마운 일이었다. 슬픔과 아픔에 절고 절어 내 몸이 오롯이 소금 한 줌으로 남는다 해도 나 혼자 감당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이 밤 어디에서 이 못난 딸의 아픔을 되새기고 있는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철커덕, 대문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내복 바람의 어머니도 부스스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며 마루로 나오셨다.   대문에 들어서는 아버지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아버지….”  


“어이구, 이 가서나야.”  


아버지도 목이 메는 듯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부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잠깐 있어 보라고 했다. 그리고 잠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 꺼내려고 애를 쓰셨다.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손끝에 겨우 딸려 나온 것은 신문지에 둘둘 말린 무엇이었다. 마루 끝에 서 있던 어머니가 그게 뭐냐고 물었다.  


“돼지고기 반 근이다”  


내게 그 뭉치를 건네주시며 아버지는 내 어깨를 한번 짚으셨다.  


그 순간 속이 다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 품속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돼지고기 반 근을 손에 들고 나는 그대로 마당에 서 있었다. 너거 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너거들 소고기도 못 사 먹인다는 혼잣말을 하며, 아버지는 어머니의 팔을 잡고서 힘겹게 마루를 오르셨다.  


바람 부는 거리에서 식육점 문을 두드리는 아버지, 지갑을 펴 보며 ‘돼지고기 한 근’ 에서 ‘반 근’으로 다시 고쳐 말하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틀거리면서도 간간이 안주머니께를 더듬어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때 나는 마음 속 활시위를 한껏 당겨 아버지를 위한 별 하나를 쏘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낡은 구두를 비춰줄 별, 아버지가 올려다보면 어느새 어깨쯤까지 다정히 내려와 주는 별 하나를.  


슬픔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걸까. 그것은 고작 반근의 무게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신문지가 엉겨 붙은 돼지고기 반 근과 맞바꿀 수 있었던 그 날의 슬픔을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사랑은 한 손으로 들 수 없는 무게였다. 참으로 온전한 한 근이었기 때문이다.


■ 정 성화 

바람의 말

댓글 0 | 조회 585 | 2023.05.23
누가 왔었나?마당이 어수선하다. 담벼락으로 기어오르던 호박은 넝쿨째 떨어져 뒹굴고 텃밭 고추는 밭고랑에 드러누웠다. 휘어지게 열매를 키우던 자두나무 큰 가지도 꺾… 더보기

제 2의 나

댓글 0 | 조회 579 | 2023.01.18
두 손을 펴서 활짝 벙글어지는 꽃잎 모양을 만든다. 손톱마다 살구꽃 배꽃이 하늘거리고 푸른 냇물도 흐른다. 손톱에 꼼꼼히 그림 그리는 게 참 즐겁다. 류마티스 관… 더보기

굄대

댓글 0 | 조회 621 | 2022.09.14
■ 최 현숙군불 지핀 방안이 후끈하다. 퀴퀴한 냄새가 훈기를 더하는 아랫목에 두레상이 놓여 있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장김치와 청국장. 농사철이면 동동걸음을 쳐도… 더보기

행복한 고구마

댓글 0 | 조회 810 | 2022.07.12
내가 강릉영림서 진부관리소 말단 직원일 때 월급이 칠천 몇 백 원이었다. 그 돈으로 어린 애 둘과 아내와 내가 한 달을 빠듯하게 살았다. 어떤 때는 아내가 담배를… 더보기

꽃보다 할매

댓글 0 | 조회 977 | 2022.05.24
천지가 꽃으로 들썩입니다. 호들갑으로 들었던 꽃 멀미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날들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꽃구경 나온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 강변에 오늘은 색다… 더보기

그리움

댓글 0 | 조회 899 | 2022.04.27
■ 최 민자전지를 갈아 끼워도 가지 않는 손목시계처럼 그는 그렇게 그녀라는 길 위에 멈추어 있다. 그녀와 관련된 기억들이 그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쓰리다. 이별의 … 더보기

첫사랑

댓글 0 | 조회 1,082 | 2022.03.09
■ 노 혜숙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덤불숲에 던졌다. 딸그락, 빈 도시락에서 수저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가슴이 콩닥거… 더보기

내가 방랑자로 떠돌 때

댓글 0 | 조회 935 | 2022.02.22
■ 장 기오젊었을 때 나는 장돌뱅이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한 달에 20일 이상을 보따리를 싸들고 이 도시, 저 항구로 배회했다. 내가 그렇게 떠돌면서 느낀 절경(… 더보기

명태에 관한 추억

댓글 0 | 조회 779 | 2022.02.09
늦가을이나 초겨울이면 우리집 부엌 기둥에 명태 한 코가 걸려 있었다. 산골 그을음투성이의 초가집 부엌 기둥에 한 코로 걸린, 다소곳한 명태 한 쌍의 모습은 ‘천생… 더보기

바둑이

댓글 0 | 조회 987 | 2022.01.27
■ 최 현숙내 방 벽에는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이사를 해도 같은 위치에서 눈을 맞추는 사십 년 지기 룸메이트다. 검정 바탕에 배와 목덜미로 하얀 털빛이 조화… 더보기

누비처네

댓글 0 | 조회 765 | 2022.01.11
■ 목 성균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 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 더보기

낙타 이야기

댓글 0 | 조회 844 | 2021.12.22
■ 최 민자까진 무릎에 갈라진 구두를 신고, 털가죽이 벗겨진 엉덩이로 고고하게 걸어가는, ‘머리는 말 같고 눈은 양 같고 꼬리는 소 같고 걸음걸이는 학 같은’ 동… 더보기

동생을 업고

댓글 0 | 조회 1,168 | 2021.12.08
■ 정 성화박수근의 그림 ‘아이 보는 소녀’를 보고 있다. 이마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상고머리에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해맑게 웃고 있다.… 더보기

먼길

댓글 0 | 조회 932 | 2021.11.23
■ 노 혜숙나는 물과 불처럼 서로 다른 부모님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 지극히 내성적이었고, 어머니를 닮아 감성이 넘쳤다. 밴댕이처럼 좁은 속은 … 더보기

겨울 편지

댓글 0 | 조회 1,039 | 2021.11.10
​■ 반 숙자방금 우체부가 다녀 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우편물에 우체부는 영문 모를 의아한 눈길을 보낸다. 오늘로서 편지는 65통을 채웠다. 9월, 10월 두 … 더보기

그대 뒷모습

댓글 0 | 조회 914 | 2021.10.27
■ 반 숙자서녘 하늘에 별이 돋는다. 마음이 잔잔해야 보이는 초저녁별, 실눈을 뜨고 별 속에 아는 얼굴이 있나 찾아본다.지난겨울에는 눈이 자주 많이 내렸다. 눈이… 더보기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

댓글 0 | 조회 966 | 2021.10.12
■ 장 기오요즘도 나는 수시로 발 앞꿈치의 굳은살을 면도날로 베어 낸다.이렇게 안 하면 발바닥이 아프다.함께 일하는 연출진이라고는 달랑 연출, 조연출 둘 뿐이었던… 더보기

『유년 기행』 자전거

댓글 0 | 조회 775 | 2021.08.24
여느 때처럼 맴생이 두 마리를 끌고 들로 나왔다. 얼마 전 아버지가 암컷 맴생이 한 마리를 사와 맴생이 친구가 하나 더 늘었다. 산과 들이 기지개를 펴고 응달 진… 더보기

돼지불알

댓글 0 | 조회 1,458 | 2021.08.11
■ 목 성균상달 저녁 때, 사랑에 군불을 지피고 앉아서 쇠죽솥의 여물 익는 냄새를 맞으면 잔잔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잘 마른 장작이 거침없이 불타는 평화로… 더보기

콩 심은데 콩 나고

댓글 0 | 조회 982 | 2021.07.28
■ 반 숙자미명(未明)이다. 가만히 뜨락을 내려 밭으로 나선다. 우리집 과수원은 뽀얀 안개 숲을 헤엄쳐 나오느라 수런수런하고 있다. 가슴을 펴고 폐부 깊숙이 싱그… 더보기

유년 기행

댓글 0 | 조회 804 | 2021.06.22
■ 이 한옥동녘이 열푸름히 열리고 희끗희끗한 서리가 엷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침 새를 쫓으러 논으로 향했다. 추수를 앞둔 즈음의 새쫓기는 내가 맡은 임무였다. 옷… 더보기

말하고 싶은 눈

댓글 0 | 조회 908 | 2021.06.10
■ 반 숙자우리 집 파수꾼 미세스 짜루는 해마다 한 번씩 출산(出産)을 한다. 정월 대보름쯤이면 휘영청 찬 달빛 아래 연인을 찾아온 미스터 견(犬)공들이 여기저기… 더보기

소풍

댓글 0 | 조회 828 | 2021.05.25
■ 이 한옥소풍 가는 날은 기분이 붕붕 떴다. 다른 날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나설 차비를 했다. 어머니는 벌써 하얀 쌀밥 도시락을 준비했다. 멸치볶음, 콩자반, … 더보기

사진첩

댓글 0 | 조회 1,049 | 2021.05.12
■ 최 현숙‘똑똑, 택배입니다.’아들이 보냈군요. 큼지막한 두 개의 상자가 사진첩으로 빼곡하네요. 웬만한 것은 버린다더니 추억까지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요. … 더보기

가을 탓인가?

댓글 0 | 조회 969 | 2021.04.29
하늘은 눈물이 날 만큼 투명했다.태풍 ‘산바’가 지나간 며칠 후부터 그랬다.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이 산허리를 감아 피어오르고 나무들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마당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