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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이 잘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속담인지 격언인지, 아니면 그냥 옛날부터 구전돼 온 말인지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살면서 심심찮게 들어본 표현이다. 그리고 이 표현에 빗되어 나온 것이 “조국이 잘 살아야 한다”이다. 전자의 경우, 결혼한 여성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겠지만 후자는 낯선 땅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들만이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나는 과거에 뉴질랜드에서, 그리고 최근 한국에서 이 표현을 실감하고 있다.
1997년쯤으로 기억한다. 뉴질랜드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시절, 한국은 IMF 외환위기 사태로 연일 전 세계 뉴스에 보도된 적이 있다. IMF 여파로 나랑 가깝게 지내던 한국 유학생들도 급히 한국으로 돌아갔고, 당시 뉴질랜드 한인잡지에는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IMF로 인한 생활고를 비판하며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두렵고 싫었던 것은 IMF 외환위기 사태를 가르쳤던 학교의 경제, 지리 수업시간이었다. 한 선생님은 한국인 학생들이 있다면 손을 들어보라고 한 뒤, IMF 위기에 대한 의견이나 생각을 묻기도 했다. 물론 악의가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괜히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업시간이 끝난 후에도 친구들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냐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고, 다른 한국인 유학생들은 뉴질랜드를 떠나는데 왜 나는 아직 남아있는지도 궁금해했다.
IMF 외환위기는 내가 뉴질랜드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에 터진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그 당시 내 조국은 한국이었고, 내 조국인 한국은 잘 살지 못했던 거다. 조국이 잘 살지 못해 겪었던 부끄러운(?) 기억이 서서히 잊혀지고, ‘설(說)’로 끝나는 듯했던 10년 주기 전 세계 국가 위기는 2020년 코로나19 펜데믹과 함께 터졌다. 그런데 지금의 내 상황은 과거와는 조금 다르다. 최근 코로나19 확산 이후 발표된 여권 파워 지수 순위에서 뉴질랜드가 전 세계 국가 여권 중 1위를 차지한 것. 현재 난 뉴질랜드 시민권자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내 조국은 뉴질랜드인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국이 잘 살아서”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회사 동료 중 뉴질랜드가 대체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지 묻는 무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번에 뉴질랜드 여권 파워 순위를 알고는 내게 와서 부럽다고 한다. 내가 영어를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내가 먼저 자랑하듯 뉴질랜드 여권 파워 순위 기사를 읽었느냐며 우쭐댄다. 학생들의 어머니도 뉴질랜드 유학 및 이민에 대해 더 많이 묻는다.
최근 뉴질랜드에 관한 자랑스러운 기사는 여권 파워 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29일 미국 대선 1차 TV토론을 보고 혼란과 절망을 느낀 많은 미국인들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맘에 ‘뉴질랜드로 이주하는 방법(how to move to New Zealand)’을 검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인기 검색어로는 ‘뉴질랜드로 이민갈 수 있나’ ‘뉴질랜드 이주’ ‘미국에서 뉴질랜드로 이주’ 등이 있었다. 전문가에 따르면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25만명 이상이 미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을 고려했다.
다른 나라로 이민을 고려할 때 가장 1순위로 고려되는 나라, 여권 파워 1위인 나라, 코로나19 방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거론되는 나라, 이게 바로 자랑스러운 뉴질랜드의 현주소다. 왜 사람들이 “친정이 잘 살아야 하고, 조국이 잘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친정과 조국이 잘 살아야 어디를 가던지 기를 펴고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