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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학교는 시험이라는 게 없어.”
엄마의 이 한 마디였다. 내성적이라 변화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내가 순순히 엄마를 따라 뉴질랜드 이민길에 올랐던 이유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에 도착한 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난 이 학교 저 학교에 끌려다니며 입학시험을 보고 있었다. 시험이 없기는 개뿔... 한국에는 없는 중학교 입학시험까지 있는 나라구만.
지금은 뉴질랜드의 교육 시스템이 많이 달라졌겠지만 내가 뉴질랜드에서 중학교에 입학을 할 때에만 해도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렇게 시험을 쳐서 입학한 학교에는 한국인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적은 한국인들 중에서도 나만큼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은 없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다른 한국인들은 뉴질랜드 학교에 입학하기 전 랭귀지스쿨에서 어느 정도 영어를 배워서 왔다고 했다.
물론, 요즘은 랭귀지스쿨도 불필요해 보인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이민길에 오르는 학생들을 보면 아주 기본적인 의사소통 정도는 영어로 할 수 있다. 지금은 영어가 초등학교 필수 과목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어 조기교육 열풍 덕이다.
하지만 난 be동사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뉴질랜드의 한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런 배경에는 아버지, 엄마의 “맨땅에 헤딩하라”는 식의 교육법 영향이 컸다. 아빠, 엄마의 교육방식은 늘 예고편이 없다. 항상 즉흥적이고, 계획이 없으며, 무모할 정도로 맨땅에 헤딩하듯 부딪치라는 것이다. 내가 기특하게도 뉴질랜드에 잘 적응해서 친구들과 대학생활을 만끽하고 있던 어느 무더운 여름, 아버지, 엄마는 또 다시 즉흥적으로 나를 데리고 한국으로 와버렸다.
이번에는 한국에 가면 시험이 없다던지와 같은 이상한 말로 나를 설득하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3살 터울의 언니가 대학을 졸업했고, 아버지가 지인과 사업을 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무작정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뉴질랜드에 사는 많은 한국인 대학생들이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을 꿈꾼다. 그리고 그들은 교환학생으로 한국 대학을 가기 위해, 또는 한국 대학으로 편입하기 위해 짧지 않은 준비 과정을 거친다. 토플 전형을 알아본 학생들은 토플학원에 등록을 한다던지, 교환학생 지원서를 미리 넣는다던지, 또는 한국에 위치한 대형 편입학원과 수차례 상담을 한다.
내 경우는 이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다음 학기 수강 신청을 걱정하고, 친구들에게 수업 같이 듣자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한국 땅에 와 있던 케이스다.
유학파... 대학 중퇴자... 이방인... 이것들이 한국에 막 도착한 그 당시의 나를 정의하던 단어들이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한국인의 모습을 한 나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사실, 한국 사람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해외파 학생들에게 우호적이진 않다. 모습은 한국인이지만 자라온 환경이 다르다 보니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는 사고방식이 많이 다르다. 사춘기를 뉴질랜드에서 보낸 사람들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한국에 막 도착한 나는 이런 사실들을 몰랐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한국에 적응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다가 우선 대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대학 중퇴자로 남을 순 없지 않은가. 뉴질랜드에서 이방인으로서 보낸 8년간의 이민 생활을 접고, 또 다시 한국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