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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경덕
나만의 달이 있다. 밤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숲속에서 뜬다. 이 달은 날씨가 흐려도 눈비가 와도 천연덕스럽게 뜬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을 하루같이 노숙하면서도 눈부시게 빛난다. 빨갛게 익은 달이 항상 나만 쳐다본다. 덩달아 내 마음의 달도 뜬다. 오래전 늦은 저녁이었다. 가게 앞에서 나른한 두팔을 쭉 뻗었다. 오른쪽 다섯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환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순간 전율이 일었다. ‘저건 내 달이야.’ 하고 점찍어 놓고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달을 바라보았다.
우리 가게 앞의 나지막한 산바락을 대각선으로 질러 키가 훤칠한 아파트가 있다. 그 옆 아래쪽이 달의 대저택이다. 한 동인 아파트와 달이 닮았다. 하나라서 외롭다는 것이. 늘어진 나뭇가지의 잎들이 밤에는 검은색으로 일제히 변해 흐느적거리면서 괴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거기에 비바람까지 몰아치는 밤엔 우우거리는 바람소리가 달에 시비를 걸어온다. 설령 온갖 잡신이 괴롭힌다 한들 달의 붉은 기운이 못 물리치겠는가. 나무들은 맑고 고요한 날도 살살 부는 바람과 그림자를 빌려 달의 얼굴을 요리조리 가려 조각달로, 옆으로 살짝 비켜서 반달로 만든다. 또 바람을 숨죽여 놓고 온달로 드러나게 한다. 그림자들 유희를 달더러 즐기라는 것 같다. 그러나 달은 부동자세다. 그 의지까지는 나무들이 어쩌지 못하나 보다.
나무가 잎을 떨친 계절에는 달의 얼굴이 더욱 밝고 훤하다. 차가운 날씨일수록 붉은 빛이 더 도드라진다. 달도 사람처럼 추위를 타지만 겨울이 좋다고 하는 듯하다. 눈앞에서 흐느적거리던 나무 이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간섭 받는 걸 싫어하는 건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달은 나뭇가지 위에 떡하니 턱을 괴고 흥얼거리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하도 긴 세월 앉아 있어 다리가 저려 일어나지 못할까. 아니면 나뭇가지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는걸까. 그 모습이 미련한 것 같기도 하고, 굳은 심지 같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에 내 마음이 꽉 붙잡혔다. 내 삶을 보는 것 같아서다. 우리 부부는 우둔하리만큼 오랫동안 이곳에서 한 업종에만 고집하고 있다. 이 달의 처지와 흡사하다고 할까.
달의 집 옆에 있는 아파트가 달의 파수꾼이라면, 달은 우리 가게의 파수꾼이 아닌가. 그러니 센 바람이 부는 날, 달도 가게도 걱정이 안 된다. 이렇듯 나와 연이 깊은 달은 나에게 아파트 가가호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삶을 생중계 해 준다. 밥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 도란도란 얘기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깔아 집집이 기쁨과 웃음이, 슬픔과 눈물이 어우러진 다큐맨터리를, 내게 다채롭게 들을 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셈이다.
동서남북에 붙어있는 달의 눈이 정말 예리하다. 달은 적게는 그 마을 일을 다 꿰고 있을 테고, 크게는 세상 돌아가는 것까지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겐 밤마다 추억의 모닥불을 지펴 주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모양이 갸륵하다.
날마다 만나는 이 달과는 깊은 정이 들었다. 그동안 둘이서 남몰래 새긴 사랑이 달의 집에 작은 강을 이루고 있다. 그 강에 넘실대는 달빛 흥건한 곳으로 소풍을 간다. 아니 계절마다 이 달이 나를 특별 손님인 양 초대한다. 달은 교교히 흐르는 달빛 속 사계의 아름다움을 나와 나누고 싶다고 손을 살며서 잡아준다. 열두 가지 색을 내는 연둣빛의 싱그러움을, 소나무가 뿜어주는 짙은 솔향기를, 오색 단풍의 고운 자태를, 시원한 여백의 여유로움을 한 보따리씩 바리바리 싸준다. 아마 내가 이제 먼 산의 산행을 못 한다는 것을 달이 눈치챘을까. 그 아쉬움을 그나마 달래 주는 게 이 산의 달빛 소풍이다. 비록 야트막한 산이지만 촉촉한 산기운을 안겨준다.
그게 좋아 밤마다 하루 일과를 돌아보며 달에게 그날 있었던 일들을 주섬주섬 털어놓는 게 일상이 됐다. 말없는 달이 큰 위로가 된다. 나를 묵묵히 지켜봐 주는 것과 나만 만나주는 믿음 때문이다. 달도 때론 숲속이 갑갑하여 비가 오면 그 빗물인 척하면서 눈물을 흘리리라. 그럼에도 언제나 꽃처럼 활짝 웃고 있다.
이런 달을 내 첫 사랑인 양 비밀이 깃든 장소에서 은밀히 만난다는 사실에 가슴 떨린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 누가 본다고 달이 닳는 것도 아니요, 누가 좋아한다고 내 사랑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고 싶다. 부모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떼쓰는 아이처럼. 달에 응석 부리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알은체 하며 그저 웃어주는 달이 고맙다.
반면 하늘에 둥실 떠있는 둥근 달은 온 누리를 밝혀주는 절대자다. 산란한 마음을 보듬어 주는 다감한 손길에 너도 나도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나만의 보름달을 더 의지하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외진 숲속에서 혼자 쓸쓸하게 서 있는 저 가로등이, 아니 나만의 보름달이 측은하지만 무척 당당해 보인다. 그 누구도 저곳에 나만의 달이 있는 것을 눈치 못 챌 정도로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또 눈길을 주는 이가 아무도 없지만 제 할 일을 게으름 피우지 않는 숨은 일꾼이다. 곳곳에 저 달 같은 이가 얼마나 많겠는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다 드러낼 여건이면 더 좋은 일이 많겠으나 담담하게 안거할 여력을 가진 것도 크게 나쁜 건 아닐 것이다.
오늘따라 나만의 보름달이 더욱 커 보이고, 광채를 더 많이 발한다. 붉은 석양처럼 눈이 부신다. 언제 왔을까. 남편이 내 옆에서 달을 보며 한마디 툭 던진다.
“달도 밝다.”
나도 한마디 거든다.
“보름달이거든.”
출처 <수필과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