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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슬며시 지나간다. 그녀를 만나러 나가는 것이리라.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알은 척할 수 없다. 알은 척 했을 때 맞닥뜨리게 될 그의 반응이 두려워서다. 오히려 앞으로 당당하게 만나러 갈 계기를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며 참기로 한다. 스스로 정리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못났다.
그녀는 대단하다. 누군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산 하나를 옮기는 일만큼 어렵다고 생각해 왔다.
믿음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했던가? 산 하나를 옮길 만큼의 믿음이면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그녀는 그토록 어렵다고 생각했던 일을 간단히 해내니 정말 대단하다는 것이다.
꼼짝도 하기 싫어하던 남편이 슈퍼엘 다녀온다. 차에 물건을 놓고 왔다, 잠깐 바람 쐬고 오겠다며 연신 들락거린다. 한술 더 떠 무언가 사오기를 부탁하면 오히려 고마워하는 눈치다. 질투가 난다. 남편에게 그녀는 어떤 의미일까? 혹여 그에게도 한숨을 쉬고 싶을 때 찾는 도피처인 것은 아닐까?
담배를 피워본 적이 있다. 맛이 궁금해서도, 피울 때의 기분을 알고 싶어서도, 그 어떤 호기심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깊게 들이마셨다가 그만큼 길게 뱉어 낸 연기 위로 “이건 담배 연기가 아니라 내 한숨이야.”라고 했던 한 선배의 말 때문이었다.
말이 멋있기도 하였고 한숨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기발함에 지체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먼저 깊게 마셨다가 후……. 아! 내 한숨이 올라간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담배를 처음 피울 때 흔히 하는 기림도 없었고, 기분이 이상하지도 않았고 밋밋했다. 주변 친구와 선배들은 속 담배니, 겉 담배니, 처음이 아니니하며 나를 화제 삼아 말들이 많았지만 담배는 내게 끌릴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기억 속엔, 생각하면 설레는 사람이 있고 너무 싫어서 만나질까 무서운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이도 저도 아니라서 아예 기억에 없는 사람도 있다. 담배는 내게 이도 저도 아닌 사람과 같았다. 피우고 싶다는 생각도, 다시 피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애써 생각지 않으면 피워보았다는 기억도 희미해질 판이다. 습관이 들어 끊지 못할 만큼의 단계까지 끌어들일 만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 후로도 누군가의 생각을 도용한 것 같은 찜찜한 마음에 오래가지 못 하였다. 이렇게 오랜 기억 속에 별 의미가 아니었던 담배에 대해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담배가 건강에 끼치는 해악을 차치하고라면 담배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싶다. 청소년들에겐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어르신들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소일거리가 된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애인이기도 하고 헤어졌다가도 몰래 다시 만나는 정부가 되기도 한다. 기다리는 마음이 동무요, 고독한 사색의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직장에선 어떠한가? 상사에게 심하게 혼나고 난 뒤 가장 짧은 시간에 위로를 받는 것은 역시 비상구에서 태우는 담배 한 대일 것이다. 휴게실에서 미주알 고주알 수다 떠는 핑계거리로도 단단히 한 몫을 한다. 오고 가는 담배 속에 쌓이는 정은 또 얼마겠는가?
남편에게 지금 담배는 헤어졌다 다시 만난 정부이다. 이 년여를 끊어 왔던 담배를 요즘 들어 다시 피우는 눈치이다. 처음 그런 기미를 알아챘을 때는 배신감도 들고 실망도 하고 마치 그가 옛 애인 만나는 걸 눈치챈 것 마냥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꼬인 감정 저 밑에서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옴을 느낀다.
혹여 그가 뱉는 연기 속에 깊은 한숨이 묻어나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에게 한 개비의 담배만큼이라도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는지 구실을 만들어 들락거리는 남편을 보며 그에게 담배 같은 마누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정부를 부러워하는 조강지처 같다. 그러나 곧 나는 조강지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한다.
담배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해소 차원이다. 일시적인 해소를 반복하는 것이 담배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한 번만으로도 가슴 깊이까지 따듯해질 수 있도록 꼭 안아 줄 테다. 그녀가 인생 뭐 있냐고 자주 그에게 속삭일 때, 나는 가끔이지만 잘 하고 있다고,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해 줄 테다.
방금 들어온 그가 손을 씻는다. 무엇보다도 건강은 차치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빠른 시일 내에 그에게서 그녀를 떼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모른 척하기로 한다. 아니 끝까지 알은 척하지 않기로 한다.
야경을 즐겨보던 베란다로 내려선다. 저 너머 불빛들이 정겹다. 저 불빛 사이사이에선 또 얼마나 많은 한숨들이 올라가고 있을까?
출처 <수필과 비평>
■ 박 진희